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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국립공원] 영구종주(영각사~무주구천동) 22㎞… 출발 때는 걱정이 태산이었으나 하산 때는 자신감 충만했던 1박 2일 산행

↑ 남덕유산 올라가는 데크계단 아래 쉼터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친구들

 

by 김지지

 

☞ 내맘대로 평점(★5개 만점). 등산요소 ★★★★ 관광요소 ★★★

☞ 22㎞에 12~13시간

☞ 영각탐방지원센터 → 남덕유산 → 삿갓봉 → 무룡산 → 동엽령 → 중봉 → 향적봉 → 백련사 (셔틀버스) → 구천동탐방지원센터

 

3년 전인 2019년 6월 희용과 대학후배 2명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소백산을 종주하면서 뜻을 모은 것이 1년 후 덕유산 종주였다. 그러려면 우리 산행 수준과 서울 출발을 감안해 대피소에서 1박을 해야 한다. 그런데 2020년 초,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덕유산을 포함 국립공원 대피소 전부가 2월부터 문을 닫았다. 이제나저제나 대피소 문이 열리기를 소망했으나 코로나19는 더욱 기승을 부릴 뿐 도무지 약화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덕유산 대피소가 2022년 7월 1일부터 문을 연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몸이 달아오른 희용이 3년 전 약속한 대학후배들 대신 일정 맞추는 게 수월해 보이는 다른 친구들로 팀을 구성했다. 희용의 대학친구인 영수와 나 그리고 희용의 과후배인 병선 이렇게 넷이다.

우리 종주 코스는 육구종주(육십령~무주구천동)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쉬운 영구종주(영각사~무주구천동)다. 그런데도 출발하기 전, 영수와 나의 걱정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영수는 체력의 방전을, 나는 여름 산행 시 빈발하는 현기증을 걱정했다. 다행히 코스 자체가 크게 힘들지 않고 천천히 걸어 별일은 없었다. 덕분에 새벽 4~5시쯤 현지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당일 종주도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산행 후 생겼다. 이번 산행은 이틀동안 15시간 20분(첫날 6시간 30분, 둘째날 8시간 50분) 걸렸다. 그중 길게 쉬거나 배를 채운 시간( 2시간 이상)을 빼고나니 순수 산행시간은 13시간 정도다. 물론 병선을 기준하면 10시간이면 가능했을 것이다.

남덕유산 올라가는 데크계단길(왼쪽)과 산행길

 

■덕유산 육구종주와 영구종주

덕유산(德裕山)은 전북 무주·장수군과 경남 거창·함양군 등 4개군에 걸쳐 있다. 소백산맥의 중심부에 솟아 있는 덕스럽고 넉넉한 육산이다. 최고봉(향적봉) 높이가 1614m나 되지만 위압적이지 않다. 능선에 솟아있는 1400~1500m 봉우리들에서도 거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덕유산의 자랑 중 하나는 장쾌한 조망이다. 여느 산에서는 보기 힘든 산그리메도 사방팔방으로 펼쳐져 있어 지리산을 연상시킨다.

남덕유에서 북덕유 향적봉으로 이어진 주능선 길이는 16㎞이고 해발고도는 1400m 안팎이다. 종주에 적합한 산세다. 물론 들머리·날머리에서 주능선까지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구간이 더 힘들고 거리도 만만치 않다. 덕유산 종주는 지리산 화대종주, 설악산 서북능선종주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종주코스로 유명하다. 이 세 곳의 종주는 산꾼으로 거듭나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세 친구들과 달리 나는 덕유산 종주가 처음이다. 지리산과 설악산 종주를 경험했다지만 전체 코스를 완주하지 못해 어디에 자랑할 정도는 아니다. 이를테면 지리산은 성삼재~천왕봉~백무동(40㎞), 성삼재~바래봉(20㎞)을 종주하고, 설악산은 서북능선종주 코스 중 남교리~십이선녀탕~한계령(20㎞)과 한계령삼거리~중청(6㎞) 코스를 일부만 걸었다.

덕유산 종주는 30㎞의 육구종주(육십령~무주구천동)와 27㎞의 영구종주(영각사~무주구천동)로 구분한다. 두 코스는 남덕유산에서 만나는데 영각사에서는 3.4㎞, 육십령에서는 8.2㎞다. 남덕유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육십령에서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바위산 특유의 날카로움과 대형산 특유의 무게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육구종주는 육십령에서 시작해 할미봉(1026m)에서 몸을 푼 뒤 서봉(1492m)을 넘는, 백두대간 코스와 상당부분 일치한다. 요약하면 육십령~서봉~남덕유~무룡산~백암봉~횡경재~빼재(신풍령) 코스가 일치한다.

덕유산 지도. 왼쪽 아래(영각사)에서 출발해 동엽령 지나 오른쪽 위(구천동탐방센터)로 내려간다.

 

육십령(734m)은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전라북도(장수군 계내면)와 경상남도(함양군 서상면)를 이어준 길목이다. 육십령 어원으로는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옛날 도둑 떼가 많아 고개 아래 주막에 60인 이상 모여야 산을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는 설이다. 희용이 46년 전, 고교 1학년 때 지리 선생님한테 들었던 이 설을 뚜렷히 기억한다며 비상한 기억력을 과시한다.

영구종주 코스는 영각사~남덕유산(3.4㎞)까지만 육구종주와 다를 뿐 이후 무주구천동까지 이어진 코스는 같다. 영구든 육구든 종주 코스에서 마지막 설천봉~칠봉으로 내려가지 않고 백련사로도 하산하는데 백련사에서 구천동탐방센터까지 계곡 옆 평지길 5㎞를 종주에 포함한 건 살짝 아쉽다. 종주의 진정한 맛은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능선길이나 산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 옆을 걷는 것이어서 탐승의 맛은 있다. 그러나 덕유산 국립공원에서는 계곡에 발 한번 담그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이 또한 아쉬운 대목이다.

 

■종주 산행

7월 1일은 장마철인데도 다행히 비가 그치고 전날 내린 비 덕분에 날씨가 쾌청하고 맑다. 우리 코스는 경남 함양 서상면 영각사에서 출발해 전북 무주구천동까지 27㎞를 걷는 영구종주다. 서울에서 출발해 하루만에 종주하기에는 거리가 멀어 삿갓재대피소에서 1박한다. 이틀 간 산행이어서 전체적으로 크게 힘들지는 않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힘든 코스를 꼽으라면 초반 영각재와 남덕유산을 치고 올라갈 때, 무룡산과 중봉 올라갈 때 정도다. 사실 이 코스도 크게 힘들지 않은 수준인데 1박2일용 배낭 무게 때문에 힘들게 느껴진다.

 

▲영각사~남덕유산

본격 산행에 앞서 영각사를 둘러본다. 영각사는 합천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헌강왕 2년(876년) 창건하고 몇 차례의 화재를 거쳐 최근에는 6·25전쟁 때 소실되어 다시 중건한 절이다. 주차장은 넓고 화장실은 황홀할 정도로 깨끗하다. 이곳에서 300m 아래에 남덕유산 산행 입구가 있고 그곳에서 400m 숲길을 10분 정도 걸어들어가면 들머리에 해당하는 영각탐방지원센터다. 산행 입구에는 마땅한 주차장이 없다. 영각탐방지원센터 안으로도 차가 들어갈 수 없어 영각사 주차장에 주차하거나 산행 입구에서 500m 아래에 위치한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주차장은 통일된 명칭이 없어 남덕유산영각사주차장(T맵) 혹은 영각매점(네이버)으로 불린다.

영각사

 

들머리인 영각탐방지원센터를 통과한 것은 7월 1일 오전 11시 40분이다. 해발고도는 716m이고 남덕유산까지 거리는 3.4㎞(산행 입구부터 계산하면 3.8㎞)다. 40~50분 정도 걸리는 해발고도 1000m인 1.5㎞ 지점까지는 비교적 완만하다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목교 2개를 건너면서 급경사가 시작된다. 국립공원답게 자연석 돌계단이 잘 정돈되어 있고 겨울철 폭설 때 길을 잃지말라고 밧줄도 길게 이어져 있다.

오래만에 덕유 종주에 나선 희용과 영수가 1차 목적지인 남덕유산 정상을 향해 초반 구간을 오르고 있다.

 

초반 산행은 급경사여서 속도가 더디다. 해발고도 1000m 지점에서 1시간 정도 오르니 ‘남덕유산 0.9㎞’ 이정표와 탐방로 안내판이 세워진 영각재(1283m) 고갯마루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야 비로소 조망이 터진다. 잠시후 남덕유산 정상으로 이어진, 남덕유의 명물이자 상징인 데크계단이 하늘을 향해 길게 뻗어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고 다시 경사진 산길을 오르면 비로소 남덕유산 정상(1507m)이다. 들머리에서 2시간 40분(3.4㎞), 영각재에서 1시간(0.9㎞) 걸렸다. 정상에서 삿갓봉까지는 4.3㎞, 삿갓재 대피소까지는 5.3㎞이고 향적봉까지는 14.9㎞다.

남덕유산 정상에서. 병선이다.

 

남덕유 정상에 서니 첩첩산중 사방이 내려다보여 장쾌하고 웅장하다. 지리산보다는 규모가 작은 탓에 지리산의 동생처럼 느껴진다. 삿갓봉, 무룡산, 중봉을 거치는 능선이 향적봉까지 유장하고 길게 뻗어있다. 남덕유산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분수령이어서 백두대간 종주 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봉우리다. 희용이 무거운 배낭에 맥주 2캔을 가져온 덕에 정상에서 제대로 맥주맛을 느꼈다. 희용이가 공용으로 쓸 다른 짐도 많이 가져와 다른 산행 때와 달리 피곤한 기색이다. 세월 무상이다.

 

▲남덕유산~삿갓봉

남덕유산 정상을 지나 100m 아래는 갈림길이다. 우리는 진행방향으로 가지만 갈림길에서 왼쪽길로 들어서면 1㎞ 지점에 육십령으로 이어진 서봉이 나온다. 삿갓봉으로 향하는데 한동안 내리막이다. 40~50분을 내려가니 월성재(1214m)다. 능선길은 조릿대와 신갈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일부 경사진 곳을 제외하면 부드러운 흙길을 걷는 것이어서 편안하다. 지리산의 능선을 걷는 느낌이다. 숲은 7월 초인데도 연초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종주는 능선을 걷는 게 기본이지만 이곳은 몇 개 봉우리를 빼고는 대부분 8~9부 능선길이다. 반드시 오르고내려야 하는 봉우리는 남덕유산(봉황봉), 삿갓봉, 무룡산(불영봉), 백암봉, 중봉, 향적봉 정도다. 월성재에서 삿갓봉까지는 2.9㎞, 1시간 50분 걸렸다.

남덕유산 정상에서 바라본 삿갓봉~무룡산~향적봉 능선

 

삿갓봉 아래에 ‘삿갓봉 → 300m’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정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급경사인데다 들머리에서 5시간 40분이 지나 살짝 지친 상태이고, 삿갓봉에 오르지 않아도 종주에는 지장이 없어 오를까말까 잠시 갈등하다가 그래도 올라가야 한다는 의지가 작동해 배낭을 내려놓고 올라갔는데 5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힘들지도 않았다.

삿갓봉 조망은 기대 이상이다. 앞으로는 향적봉 방향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고 뒤로는 남덕유산이 눈짓을 한다. 따라서 삿갓봉은 무조건 올라가 볼 일이다.  사실 삿갓봉은 덕유산의 랜드마크다. 삿갓처럼 생긴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 덕유산 봉우리 어디에서나 보이기 때문이다. 삿갓봉에서 내려와 배낭을 메고 다시 전진하는데 몇분 만에 또 다른 삿갓봉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거리가 300m가 아니라 100m다. 게다가 정상이 보일 정도로 완만하다. 오늘도 등산에 최적화된 몸을 갖고 태어난 병선이 앞서 나간다. 병선은 힘이 넘쳐 얼마든지 산행 속도를 올릴 수 있지만 뒤에 따라오는 특히 가장 늦게 따라가는 나를 위해 쉬엄쉬엄 가다가 기다려준다.

 

▲삿갓재 대피소

삿갓봉에서 삿갓재 대피소까지는 1㎞ 거리에 40분 걸렸다.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등 전국 국립공원의 대피소는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때문에 2020년 2월 대피소 운영을 중단했다. 그러다 코로나가 약화되어 지리산, 설악산, 소백산 3개 공원의 일부 대피소는 중단 2년 3개월만인 2022년 5월 16일부터 시범적으로 개방했다. 덕유산은 시범 개방 없이 7월 1일 개방했다. 우리가 삿갓재 대피소를 찾은 날도 7월 1일이다.

대피소 도착 전, 온몸이 땀에 쩔어 불쾌하다. 시원한 물로 몸을 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대피소에서는 언감생심이다. 대피소에서 파는 생수라도 사서 몸을 닦아야겠다고 마음 먹고 대피소에 도착했는데 믿기지 않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피소 50m 아래에 샤워를 해도 충분한 샘물이 있다는 것이다. 전날까지 내린 비 덕분이겠지만 대피소에서 샤워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 전 대피소에 전화를 걸었을 때만 해도 샘물에서 물이 쫄쫄쫄 나오고 그나마 공사 중이어서 샘물을 이용할 수 없다고 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샤워를 해도 충분한 양의 샘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1200m 고지에서 온몸에 찬물을 마구 끼얹는 호사를 누린다는 것은 샘물의 축복이다.

문제는 대피소 내부였다. 80㎝의 폭이 내게 주어진 공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양옆으로 개방된 공간이 아니라 나무칸막이로 막아놓은 2층 침대여서 팔이든 발이든 80㎝ 공간을 넘지 못하니 답답했다. 게다가 난방을 너무 세게 틀어 피곤한 몸인데도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뒤척이며 자는 나의 잠버릇 때문일 수도 있으나 이유가 무엇이든 정자세로 누워있어야 했던 힘든 하룻밤이었다. 비몽사몽하다가 새벽 1시쯤 밖으로 나가 반짝반짝 빛날 덕유산 하늘의 별이라도 바라보려 했으나 대피소 빛 때문에 그마저도 실패했다. 어두워지기 전, 대피소 밖에서 돼지고기 삼겹살과 오리고기를 구워먹는데 희용이 우리를 위해 열심히 굽다가 그만 2도 화상을 입고 말았다.

 

▲무룡산 일출

오전 4시 12분 대피소를 떠났다. 일찌감치 출발한 것은 대피소에서 2.6㎞ 떨어진 무룡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 위함이다. 40분 정도 오르니 무룡산 데크계단길의 시작이다. 계단에서 뒤돌아보니 삿갓봉과 남덕유 사이 협곡을 운무가 뒤덮고 있다. 계단길은 북동 방향이다. 따라서 정상 도착이 늦어지면 계단을 오르다가 오른쪽(동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결국 먼저 올라가 무룡산 정상에서 일출을 만난 친구들과 달리 5시 14분, 무룡산 100m 아래 계단에서 고개를 내미는 아침해를 만났다.

무룡산 계단에서 바라본 일출

 

덕유산 동쪽 일대를 벌겋게 달군 일출을 감상하고 홀로 무룡산에 도착하니 5시 30분이다. 정상에는 작은 헬기장과 표지석이 있다. 방금 올라온 데크계단 쪽을 바라보니 삿갓봉까지 능선이 길게 펼쳐있다. 그 뒤로 남덕유산(왼쪽)과 서봉(오른쪽)이 남덕유의 맹주처럼 위용을 자랑한다. 삿갓봉과 남덕유 사이의 운무가 신비롭다. 동쪽으로는 운해가 넓게 퍼져있고 운해 위로 봉우리 몇 개가 걸쳐있다.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섬 같다.

무룡산 정상에서 이른 아침을 먹는데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아침을 해결한 다른 산꾼들이 말을 걸어온다. 알고보니 백두대간 팀이다. 우리 코스가 백두대간 일부 구간(남덕유~백암봉, 13.7㎞)과 겹쳐 그들과는 이후 동엽령과 백암봉에서 두 번 더 만났다가 완전히 작별했다. 백암봉에서 우리는 중봉으로 올라가고 백두대간 팀은 오른쪽 횡경재~지봉~대봉~신풍령(빼재)으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백두대간 팀의 배낭이 어마어마하다. 크기도 크지만 무엇보다 무거워보였다. 대단해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학대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무룡산에서 바라본 삿갓봉(가운데) 모습. 그 뒤 남덕유산(왼쪽)과 서봉(오른쪽)

 

▲무룡산~동엽령

무룡산 이후 길은 비교적 평탄한 숲길이다. 산행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내가 감당할 정도다. 그때까지 영구종주 코스 중 오르내림 구간이 있는 곳은 남덕유, 삿갓봉, 무룡산 정도였다. 앞으로는 주봉 오르막만 있을 뿐 나머지 구간은 완경사이거나 경사가 있어도 짧다. 사실 덕유산 종주를 떠날 때는 막연하게 앞이 탁 트이고 너른 개활지를 연상했다. 그래서 7월의 뙤약볕이 내리쬘 것 같아 걱정했는데 직접 와보니 대부분 숲속길이다. 백암봉과 주봉 부근만 개활지일 뿐 대부분의 길은 이런저런 나무들이 양옆에서 햇볕을 막아준다. 일부 구간에는 온갖 식물들이 허리와 가슴까지 차 올라 있어 둘째날 산행 때는 바지와 등산화가 온통 이슬에 젖었다.

무룡산을 떠나 30분을 걸어가니 날카로운 바위 몇개가 모여있는 무명봉이다. 이름은 없으나 앞뒤 능선이 모두 보여 조망이 좋다. 다시 허리까지 차오른 풀숲을 25분 정도 걸어가니 돌무더기 같은 칠이남쪽대기봉(1420m)이다. 국내 유명산에 산재한 봉우리 이름 중 가장 길고 개성도 없다.

무명봉에서 폼 잡고 있는 친구들

 

무룡산~동엽령 길은 향적봉 능선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나무는 없고 풀만 있어 사방이 트여 있다. 칠이남쪽대기봉에서 동엽령(1270m)까지 2㎞에 1시간 10분 걸렸다. 동엽령은 옛날 전북 무주와 경남 거창을 연결하는 주요 교역로였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 동엽령에서 한참을 쉬었다. 동엽령에서 향적봉까지는 4.3㎞다.

 

▲백암봉~중봉~향적봉~백년사

동엽령에서 2.2㎞ 떨어진 백암봉(1503m)까지, 초반은 평지 능선길이고 후반은 경사길이다. 동엽령에서 백암봉까지 1시간 정도 걸렸다. 백암봉에서 중봉까지 1㎞는 지리산 연하선경과 비슷한 덕유평전이다. 사방이 탁 트여 ‘산상정원(山上庭園)’으로도 불린다. 중봉 오름길은 데크계단길이다. 새벽 4시부터 걷다보니 평소같으면 힘들지 않았을 중봉 계단길이 힘들게 느껴진다. 결국 백암봉에서 중봉까지는 1㎞에 불과한데도 50분이나 걸렸다. 중봉에서 바라본 덕유평전은 어머니 품처럼 푸근하다. 중봉 지나 향적봉 대피소까지는 고목과 고사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중봉에서 향적봉 대피소까지는 20분 걸린다. 그곳에서 쉬면서 콩국수를 만들어 먹다보니 1시간이나 걸렸다. 산에서 맛보는 콩국수라니. 병선의 탁월한 선택이 빛을 발한다. 향적봉 대피소는 삿갓재 대피소와 달리 콜라와 아이스커피도 판다.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으로 올라오는 관광객이 많기 때문이다.

덕유평전에서 바라본 중봉

중봉에서 내려다본 덕유평전. 그 뒤로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길게 뻗어있다.

대피소에서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1614m)까지는 100m만 오르면 된다. 향적봉은 지리산 노고단 꼭대기를 닮아 널찍하다.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에 이은 남한 네 번째 고산답게 경치가 수준급이다. 향적봉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가을하늘처럼 공활하고 청명하다. 첩첩산중 위로는 희용이가 자신의 호로 삼고 싶어하는 ‘한운(閑雲)’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향적봉에 오르니 희용이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다. “오래전 덕유산 국립공원의 일부인 적상산의 안국사 스님이 적상산 향로봉에서 피운 향이 이곳에 쌓여 이름이 향적봉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흥미로운 이름이다. 우리는 백련사로 내려간다.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 하늘이 공활하고 청명하다.

 

▲백년사 하산

향적봉에서 백련사까지는 2.5㎞ 거리에 1시간 40분 걸렸다. 급경사인데도 백련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다. 거리가 짧아서일 것이다. 백련사에서 특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한석봉의 필체인 大雄殿(대웅전) 현판이다. 집자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석봉 필체라니 저절로 눈이 간다.

백련사에서 무주구천동 계곡이 시작되는 ‘구천동 어사길’까지는 5분 거리다. 구천동 어사길은 과거 주민들이 걷던 길인데 백련사에서 덕유산 탐방센터까지 4.9㎞ 거리다. 그런데 구천동 어사길 초입에 전기셔틀버스가 있다. 노약자를 태우고 하루 5차례 운행하는데 손님이 없어 우리도 태워준단다. 게다가 공짜다. 덕유산 탐방센터까지 걸어가야 영구종주 완주이지만 우리는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셔틀버스는 20분 후 우리를 탐방센터 부근에 내려놓았다.

무주구천동 월하탄 폭포

 

우리는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내려왔지만 하산 방법은 2가지 더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향적봉에서 가까운 설천봉(1520m)에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설천봉에서 스키장을 가로질러 내려가 능선을 타고 칠봉(1307m)을 지나 구천동탐방지원센터까지 걷는 6.4㎞다. 전자는 종주로 인정하지 않고 후자는 인정한다. 백련사로 하산해 구천동탐방지원센터까지 걸어가는 것도 인정한다.

향적봉~구천동탐방지원센터를 기준하면 설천봉~칠봉 코스가 향적봉~백련사 코스보다는 거리가 짧다. 앞 코스는 7㎞, 뒤 코스는 7.8㎞다. 다만 향적봉~백련사 구간은 급경사일 뿐 험하지 않으나 칠봉 하산 코스 1㎞는 급경사 너덜지대여서 다소 험한 편이다. 우리는 영구종주를 선택한데다 종주 인증에도 연연하지 않아 어느 코스로 내려가든 상관없지만 육구종주를 고집하는 산꾼들에게 코스 선택은 중요하다.

 

▲택시 이용(날머리→들머리)과 망외소득

우리가 산행하기 위해 주차한 곳은 영각사 주차장이고 산행을 끝낸 곳은 구천동탐방지원센터이므로 하산 후 영각사 주차장으로 이동해야 한다. 다행히 전에 알아둔 비교적 저렴한 비용을 제시하는 콜택시가 있어 걱정이 없다. 일반택시를 타고 미터기로 계산할 경우 8만원인데 6만원을 받는다. 고마운 택시기사 전화번호는 010-6476-3307이다. 이 택시기사는 네이버에서 덕유산 밴드를 운영할 만큼 덕유산에 정통하다. 산행을 마치고 나니 희용과 병선이 망외소득이 네 가지라고 귀띔한다. 삿갓재 대피소 샘물로 전라 목욕, 백련사에서 구천동탐방지원센터까지 공짜로 이용한 전기셔틀버스, 향적봉 대피소에서 먹었던 콩국수, 무룡산 일출이다.

 

덕유산에서 만난 꽃들. 왼쪽 아래에서 시계방향으로 큰까치수영, 돌양지꽃, 참조팝나무, 산꿩의다리

 

덕유산에서 만난 꽃들. 왼쪽 아래에서 시계방향으로 박새, 꿀풀, 범꼬리, 원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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