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독일 ‘V 로켓’ 발사와 베르너 폰 브라운

↑ V-2 로켓과 베르너 폰 브라운

 

1944년 6월 6일 감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영국은 한시름 놓고 있었다. 그런데 1주일 만인 6월 13일 발사지를 알 수 없는 괴비행체들이 날아와 영국 런던 곳곳에서 폭발해 시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기이한 것은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했을 법한 폭격기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곧 밝혀지지만 그것은 ‘보복 무기’라는 뜻의 독일어 ‘vergeltungs waffe’의 이니셜에서 이름을 딴 ‘V-1’ 미사일이었다.

독일이 순항미사일의 원조격인 V-1을 개발·생산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폭격기 한 기를 생산할 수 있는 비용이면 몇십 기의 V-1을 만들 수 있고 또 대공 포화에 맞아 노련한 조종사가 숨지는 피해도 줄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V-1 시제품이 완성된 것은 1944년 2월이었다. 제원은 길이 8.32m, 최대 직경 1.42m, 발사중량 2,150㎏, 탄두중량 850㎏이었으며 항속거리는 250㎞, 순항속도는 시속 600㎞이었다. 문제라면 기술적인 한계로 정밀 폭격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독일은 부정확한 폭격 효과를 물량으로 상쇄했다. V-1이 처음 런던에 떨어지고 이틀 뒤인 6월 15일 200여 발의 V-1을 발사한 것을 비롯해 1944년 10월까지 모두 8,500여 발을 영국으로 발사했다.

영국은 한동안 V-1의 발사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발사 추정지를 알아내 맹폭을 가하고 레이더와 방어 장치 개선으로 요격률이 높아지면서 조금씩 공포 상태에서 벗어났다. V-1의 순항속도도 시속 600㎞에 불과해 전투기들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의 전투기들은 상공을 초계 비행하다가 날아오는 V-1을 발견하면 바로 요격했다. 또는 방공 기구들을 수백 개 공중에 띄워놓고 V-1을 막았으며 북프랑스에 집중되어 있는 V-1 발사 기지들을 직접 폭격해 아예 미사일을 발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영국으로 발사된 8,500여 발 중 전체적으로 72%가 추락하고 28%만이 영국에 도달했다. 그 중 런던에 다다른 것은 9%에 불과했다. 그래도 V-1으로 영국 민간인의 인명 피해는 사망자 6,100여 명, 중상자 1만 7,900여 명에 달했다.

 

독일 V 로켓 런던 시민 공포에 빠뜨려

영국이 비로소 V-1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안도하고 있던 1944년 9월 8일, 이번에는 요격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바다를 건너온 대형 미사일이 런던 땅을 초토화해 또다시 런던 시민을 공포에 빠뜨렸다. 영국인이 ‘악마의 사자’라고 부른 장거리 로켓 ‘V-2’가 실전에 투입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V-2의 공격으로 이날 하루 동안 런던에서만 38채의 가옥이 부서지고 2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V-2의 발사지를 알았다고 한들 음속의 4배에 가까운 시속 5,760㎞의 속도로 프랑스에서 3∼4분 만에 날아와 떨어지는 데는 영국의 방어망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명중률이 낮아 실전 병기로서의 가치가 높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유도장치가 정밀하지 못해 대부분 목표 지점의 수㎞ 밖에 떨어지거나 바다에 떨어진 것도 많았다. 그런데도 1945년 3월까지 독일이 발사한 3,000여 발의 V-2 로켓으로 영국에서만 2,700여 명이 죽고 6,500여 명이 다쳤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V-2는 로켓을 이용한 탄도미사일이고 V-1은 순항미사일이다. 탄도미사일은 발사 후 관성의 법칙에 따라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비행한 뒤 목표물에 떨어지는 미사일이고 순항미사일은 발사 후 일정 고도를 유지하며 비행한 뒤 떨어지는 미사일이다. 현대 미사일의 양대 산맥인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이 모두 1940년대 중반 독일에서 태동한 셈이다.

미사일과 로켓은 지구의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르는 우주속도를 낼 수 있느냐 없냐에 따라 구분된다. 즉 로켓은 우주속도를 내는 것이고 순수 미사일은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V는 로켓이 아니라 미사일이다.

 

V 로켓의 1등 공신은 베르너 폰 브라운

V 로켓의 1등 공신은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이었다. 그는 독일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929년 독일우주여행협회에 가입하고 1930년 입학한 베를린공대에서 액체연료 로켓을 연구하는 등 10대 때부터 로켓 개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독일우주여행협회는 헤르만 오베르트를 중심으로 1927년 6월에 설립된 협회로 수많은 로켓 실험을 거쳐 1933년 ‘A-1’이라는 액체 로켓을 개발했으나 발사에는 실패했다.

당시 독일우주여행협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브라운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다. 1932년 11월 설립된 독일군 산하 로켓연구소 소장 발터 도룬베르거 대위였다. 브라운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로켓연구소 연구원으로도 활동했다. 1934년 12월에는 연구원들과 함께 알코올과 액체산소를 추진제로 하는 ‘A-2’ 로켓의 비행 실험에 성공하고 1936년 ‘A-3’와 ‘A-4’ 개발에 착수했다.

이처럼 로켓 개발에 탄력이 붙자 히틀러는 실험 규모를 확대하고 실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36년 8월 발트해 연안의 작은 섬 페네뮌데에 대규모 로켓연구소와 공장을 건립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안팎의 강제수용소 등에서 끌려온 폴란드인, 프랑스인 노동자 중 1만 명이 과로와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브라운과 로켓연구소는 1937년 12월 A-3 로켓을 개발했으나 발사 실험은 모두 실패했다. A-4 로켓은 두 번의 실패 끝에 1942년 10월 3일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A-4 로켓은 그때까지 인류가 도달한 최고 높이인 84km까지 치솟았다가 193㎞를 날아 목표 지점 부근에 떨어졌다. 길이 14m, 무게 13톤의 A-4 로켓은 사거리가 360㎞나 되고, 탄두에 최대 1톤의 폭약을 탑재했다. A-4 로켓이 1943년부터 생산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낸 영국군이 1943년 8월 17일 페네뮌데를 공습했으나 로켓의 제작·시험 시설을 파괴하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수십 기의 폭격기가 격추되고 수백 명의 공군이 전사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독일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히틀러는 A-4 로켓의 이름을 V-2로 바꿔 사실상 개발을 완료한 V-1과 함께 연합군을 한 방에 날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V-1은 1944년 6월 13일, V-2는 3개월 뒤인 9월 8일 런던을 향해 처음 발사되었다. 이후 독일은 V-2 로켓을 대량생산해 1945년 3월까지 3,000여 발을 발사했다. 이 중 대부분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앤트워프)과 영국의 런던으로 집중 발사되었다.

 

브라운 개발 로켓, 美 익스플로러 1호와 아폴로 11호 발사도 성공시켜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전쟁 승리를 확신한 미국과 소련은 V-2 로켓 개발 연구원과 발사되지 않은 V-2 로켓 확보 경쟁에 나섰다. 브라운은 페네뮌데 연구소가 소련에 점령되거나 독일군에 의해 파괴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1945년 3월 관련 장비와 시설을 뜯어내 독일 남부 지역으로 옮겨놓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와 도면, 각종 문서들도 산속 동굴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5년 5월 초 브라운의 동생이 미군을 만나 독일의 1급 로켓 기술자 120여 명이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의사를 타진했다. 마침 미국은 로켓 과학자, 관련 자료, 로켓 부품을 확보하기 위해 ‘페이퍼 클립(오버캐스트) 작전’을 세워놓은 터여서 수백 대의 차량을 동원해 로켓 과학자들과 가족들, V-2 관련 각종 기록과 장비, 수 백발분의 로켓 부품 등을 입수해 미국으로 가져갔다.

브라운은 종전 후인 1945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가 1946년 4월 첫 V-2 발사 실험을 성공시켰다. 이후에도 수십 기의 실험에 성공한 끝에 ‘레드스톤 로켓’을 제작했다. 레드스톤은 나중에 주피터C 로켓으로 개량되어 1958년 1월 31일 무게 13.97㎏, 직경 15㎝ 크기의 미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주피터C 로켓은 1961년 5월 앨런 셰퍼드가 프리덤 7호를 타고 미국 최초로 우주비행을 할 때도 사용되었다.

브라운은 1960년 NASA 내 마셜우주센터 소장으로 부임해 달 착륙에 필요한 초대형 새턴 로켓을 제작하고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성공시켰다. 그가 만든 15기의 새턴 로켓은 단 한 명의 인명 손실도 없이 총 45명의 미국인을 우주로 날려 보냈다. 1977년 6월 그가 죽자 과거 V-2 생산기지를 짓는 과정에서 그가 보인 비인간적인 처사가 뒤늦게 드러났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주 개발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악마에게 영혼을 판 ‘20세기의 파우스트’라는 비판이 함께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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