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국무회의는 비로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감격의 상징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헌법에 따라 7월 20일 국회에서 초대 정·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가 실시되었다. 참석자는 국회 재적의원 198명 중 196명이었다. 각 정파는 이승만이 될 게 뻔한 대통령직보다는 부통령과 국무총리에 관심을 보였다. 부통령은 선출직이고 국무총리는 임명직이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80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구와 안재홍이 각각 13표와 2표를 얻었고, 미국 시민권을 가진 서재필에게 던진 1표는 무효표가 되었다.
오후에 진행된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시영이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62표를 얻은 김구를 제치고 103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해방 후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두 지도자 중 김구는 임시정부의 법통 고수에 매달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대세를 거부하다가 형해화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의 극동 정책에 주파수를 맞춘 덕에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 후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민당과 갈등을 빚어 양측 간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악화했다. 당시 원내에 70여 석(무소속의 한민당계 포함)을 확보하고 있던 한민당은 이승만이 압도적 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자기들의 공로라고 자부하며 총리 이하 상당수의 국무위원 자리가 한민당에 배정되기를 기대했다. 한민당의 김성수 위원장도 국무총리로 입각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자신을 포함한 7명의 각료 명단을 이승만에게 전달한 뒤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7일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북 출신의 조선민주당 소속 이윤영을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국회에 인준을 요청했다. 의원들은 한결같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이 목사를 편애해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국회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고령에도 180표라는 압도적인 지지 받아 초대 대통령에 당선
특히 한민당은 이승만이 1945년 10월 16일 환국한 이래 그를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진력했는데 의식적으로 한민당을 홀대한 것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이승만이 당시 원내 제1당인 한민당의 김성수 위원장을 총리로 지명하지 않은 것은 김성수를 총리로 지명하게 되면 한민당의 세력이 비대해지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에 위험 요소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회는 한민당이 주동이 되어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이윤영의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켰다. 대통령의 직무에 대한 첫 비토였다. 이승만은 1차 총리 지명이 부결되자 민족청년단을 창설한 이범석을 2차로 지명했다. 이범석은 김성수를 직접 찾아가 협조를 요청한 것에 힘입어 8월 2일 110표 대 84표로 국회 인준을 통과했다.
8월 5일 발표된 초대 내각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외무 장택상, 내무 윤치영, 재무 김도연, 법무 이인, 문교 안호상, 농림 조봉암, 상공 임영신, 사회 전진한. 교통 민희식, 체신 윤석구, 공보처장 김동성, 총무처장 김병연, 법제처장 유진오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민당 출신의 윤치영, 장택상, 이인 등이 명단에 포함되긴 했으나 이들은 이미 당적을 떠났기 때문에 순수한 한민당 출신은 김도연뿐이었다.
내각 인선에서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조봉암이었다. 한민당은 토지개혁법안 통과를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공산주의 운동 경력이 있는 조봉암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나 그를 낙마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한민당은 조각 과정에서 이렇게 이승만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하자 그동안의 협조 관계를 포기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선언했다.
한민당은 위축된 당세를 보강하고 진보적인 국회 내 소장파와 맞설 필요성을 느껴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그룹, 대동청년단의 이청천 그룹과 연대해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해 본격적인 야당의 길을 걸었다. 한편 제헌국회 내에는 한민당 말고도 이승만과 맞서는 또 하나의 야당 세력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50여 명의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이처럼 제헌국회 내의 세력 구도는 세 세력의 쟁점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정립 구도였다.
첫 국무회의는 8월 5일 열렸다. 국무회의는 비로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감격의 상징이었다. 첫 국무회의 후 안호상 문교장관이 이승만에게 단기를 사용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이 이를 받아들여 제1공화국은 단기를 사용했다.
유엔총회,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에 있어 유일한 정부’ 결의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앞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었다. 중앙 단상 이승만 대통령 곁엔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앉았다. 3·1 독립운동 33인 중의 한 사람인 오세창이 “신생 정부 대한민국을 갖게 된 감격 비할 바가 없다”며 식의 시작을 알렸다.
뒤이어 이 대통령이 “오늘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민국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는 것입니다”라고 입을 열었다. 대통령은 민권과 자유, 자유와 책임, 통상과 공업 진흥, 근로자와 기업의 공존, 통일 방략 등 신생 대한민국의 포부를 밝힌 다음 ‘대한민국 30년 8월 15일 대통령 이승만’이란 말로 연설을 맺었다. ‘대한민국 30년’은 대한민국이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선언이었다.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맡았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1948년 10월 8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된 제3차 유엔총회에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기능이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보고서였다. 한국 문제는 총회 끝 무렵인 12월 7일 정식 의제로 다뤄져 12월 12일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에서 유일한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결의와 함께 통과되었다. 찬성 48 대 반대 6, 기권 1이라는 압도적 지지였다. 유엔총회의 승인에 따라 자유 우방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도 잇따라 수립되었다. 1949년 1월 1일 미국이 대한민국 정부를 처음 승인한 것을 시작으로 자유중국(1.4), 영국(1.18), 프랑스(2.5), 필리핀(3.3)이 뒤를 따랐다.
이처럼 험난한 여정을 거쳐 건국한 대한민국인데도 남한만의 정부라는 이유로 “체제를 불문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했어야 한다”는 통일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이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통일정부 수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당시의 국내·외적 조건에서 그것이 실제로 가능했겠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이승만의 단정 노선은 냉전에 저항하기보다는 미국에 편승하여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토대로 북한을 통일하자(북진통일)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