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 나세르 대통령의 죽음으로 대통령에 오른 안와르 엘 사다트는 나세르의 길과는 다른길을 선택했다. 외교적으로는 친소에서 친미로 바꾸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기울어있는 내정에는 자본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1977년 11월 적국인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한 그를 향해 세계는 ‘용기와 결단력있는 지도자’라는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아랍국가들로부터는 ‘배신자’라는 거센 비난을 들어야 했다. 1979년 3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후 사다트는 반대파의 암살 위협에 시달려왔다. 결국 ‘고독한 파라오’가 된 그는 반대세력의 탄압에 나섰고 3000명의 반대파를 체포·수감해 과격파의 맹렬한 증오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1981년 10월 6일. 카이로 북동부 ‘승리의 거리’에서는 안와르 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전승기념 군사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있었다. 미라주 전투기 편대가 굉음을 울리며 저공으로 에어쇼를 펼치고 있던 오후 1시쯤, 갑자기 사열대 앞을 통과 중이던 장거리포 견인트럭 1대가 멈춰서는가 싶더니 기관총 소리가 요란했다. 사열대의 사다트를 향해 4명의 암살범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사다트는 머리와 가슴 등에 5발의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심장박동이 중단된 상태였다. 불과 40초만에 끝난 총격전으로 사다트를 포함 9명이 숨지고 38명이 부상했다. 범인들도 3명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1명은 체포됐다.
사건 당일 밤 무바라크 부통령이 과격파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암살범이라고 발표했지만, 사다트의 피격 순간이 카메라에 보이지 않고 목격자도 나타나지 않아 한동안 “대통령이 피격 전에 이미 살해되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기도 했다. 사실이 무엇이든 국민은 이미 암살 이유를 꿰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