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빼앗기고 임시정부가 있던 대전마저 위태롭던 1950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손수 타자로 친 문서 하나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전달한다. ‘현재의 전쟁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한국군에 대한 일체의 지휘권을 귀하에게 이양한다’는 이른바 ‘대전협정’이었다. 국가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아낼 무기도 군사도 없을 때, 우리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이렇게 유엔군에 넘어갔다.
김일성의 남침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으나 7월 7일 유엔안보리가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7월 8일 맥아더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면서 전세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7월 13일 도쿄의 미8군사령부가 대구로 이동하고, 7월 14일 대전의 우리 육군본부마저 대구로 이동하면서 모든 전력은 대구로 집결했다. 우리 정부마저 이틀 후 대구로 이동하고 20일에는 대전마저 적의 수중에 떨어질 정도로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중대 결정을 한 것이다.
판단은 옳았다. 어차피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16개국의 우방국이 하나가 되어야 할 상황에서 국군만 혼자서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이 대통령은 착잡해하는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작전지휘권을 되찾아 오겠다”라며 유연한 결정이었음을 강조했다. 협정은 국가간 조약이나 협약이 아니어서 양국 국회의 동의나 비준은 거치지 않았으나, 17일 맥아더가 이 대통령에게 보낸 “결정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답신과 함께 25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되어 국제적으로는 사후에 공식화되는 절차를 밟았다.
“언제고 되찾아 오겠다”는 이 대통령의 다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서울수복 직후인 9월 30일, 정일권 총장을 불러 “자진해서 국군지휘권을 맡겼으니 되찾아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이라며 ‘38선 단독돌파’ 명령을 내려 대전협정을 스스로 파기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휴전을 앞둔 1953년 6월에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대결단을 내림으로써 대전협정에 연연해 하지않고 민족의 이해를 우선하는 국가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국가가 어려울 때는 미군에 협조하고, 자신이 생겼을 때는 우리 식대로 하겠다는 노정치가의 고집이자 용미(用美)의 지혜였다. 휴전성립 후에도 변화가 없던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1967년 7월 9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발효와 함께 폐기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