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브라운이 지하벙커에서 결혼한 1945년 4월 29일, 브라운의 매제인 헤르만 페겔라인이 지하벙커를 빠져나가 스웨덴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혀 총살되었다. 하루 전까지 페겔라인을 심문한 사람은 게슈타포(비밀경찰) 대장 하인리히 뮐러였다. 그러나 총살 당일에 뮐러를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어 생사를 둘러싼 논란이 지금까지도 끊이질 않고 있다.
뮐러는 일개 지방경찰에서 게슈타포 대장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정치에는 무관심해 공산당이든 나치당이든 정치적 격변 따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명령에만 따랐다. 나치당원이라 해도 질서를 방해한다 싶으면 어김없이 잡아들였다. 때문에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되고 나치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해고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해고는커녕 경찰 내에 신설된 ‘반소련과’가 맡겨지면서 수직상승의 기회를 잡았다. 정치 쪽을 기웃거리지 않는 충성심을 히틀러가 높게 평가한 것이다. 뮐러는 묵묵히 임무에만 충실했고, 결과는 독일 공산당의 일망타진이었다. 공로를 인정 받아 1935년 신설된 게슈타포의 책임자가 됐다. 뮐러는 정치성향이 강한 지식인을 경멸했다. 부하를 뽑을 때도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을 위주로 뽑았다. 도덕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고 양심의 가책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
종전 후인 1945년 가을, 베를린의 관청가 폐허에서 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계급장과 신분증이 뮐러임을 알려주었다. “뮐러가 포위된 베를린에서 탈출하려다 살해된 것”이라는 추정만 오고 갔을 뿐 종전 직후의 혼란스런 상황이라 정확한 사인조사 없이 시체는 묘지에 묻혔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전쟁 때 붙잡혀 소련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10년 만에 귀환한 독일 병사들 입에서 믿기지 않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소련에서 대령 복장을 한 뮐러를 보았다는 것이다. 포로장교들의 진술도 생전의 뮐러 모습 그대로였다. 서독 정부는 증언들을 무시했으나 알바니아와 동독에서 비밀경찰로 활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잇달아 접수됐다. 의문을 풀기 위해 1963년 뮐러의 묘지를 파헤쳐 시체를 검시했다. 묘지에는 3구의 시신이 있었으나 놀랍게도 뮐러의 시신은 아니었다. 이후 파나마에서의 체포소동, 미 CIA의 사망확인 등 소문만 무성하지 어느 것 하나 확인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