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영국에서 건조된 대형 수송선 한 척이 있다. 선명은 ‘팔라스(Pallas)호’. 배무게 3432t에 배 길이가 105m나 된다. 당시로서는 초대형 선박이었다. 일본이 이 배를 구입한 것은 1894년. 가치다테마루호(勝立號)로 이름을 바꿔단 배는 일본 큐슈~홍콩 간 석탄수송에 주로 이용됐다. 그러나 크기만 컸지 석탄 소모량이 높고 잦은 기관고장으로 수리비가 많이 나왔다. 배 처리에 골머리를 앓으며 적당한 원매자를 기다리던 중 조선 정부가 걸려들었다. 주한 일본공사관이 거간꾼으로 나섰다고는 하지만 조선 정부의 구입 동기도 허황스러웠다.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외국 군함이 축포를 쏠 때 우리도 답례해야 하는데 군함이 없어 축포를 쏠 수 없다”는 우국충정에 찬 한 신하의 나라 걱정이 고종 귀에 솔깃했던 모양이다.
일본이 용도폐기한 군함에서 고물 대포를 뜯어내 배에다 장착하자 화물선이 군함으로 둔갑했다. 승무원도 72명이 필요한 그럴듯한 군함으로 바뀐 것이다. 계약 금액은 일화로 55만원.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할 때 금액이 25만원이었는데 이 배를 다시 9년간 사용하다 판 가격이 55만원이라면 바가지를 넘어서 사기를 당한 꼴이다. 명색이 군함인데 이름이 없을 수 없다. 고종이 ‘나라힘을 키운다’는 뜻의 ‘양무호’를 하사했다.
1903년 4월 16일 양무호가 일본군의 운전속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고물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여기저기 말들이 많았다. 6월 1일자 황성신문은 ‘한 명의 수병도 없는 상태에서 재정 낭비’라고 비난했다. 당시 조선인 중에는 근대식 군함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일본에서 근대식 기선 교육을 받은 사람이 신순성이다. 그는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상선학교에서 수학하고 1901년 8월 귀국해 있었다. 조선 정부는 1903년 8월 신순성을 함장으로 임명하고 72명의 대원을 선발했다. 운항 기술은 일본 해군에서 파견된 사관에게 전수받았다. 그러나 배도 고물이려니와 운전할 사람도 없어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구입순간부터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조선 정부가 예산도 마련하지 않고 덥석 구매계약부터 체결하는 바람에 1904년 12월 모든 금액을 완전 지불했을 때 총구매금액은 61만원으로 늘어났다.
군함 활동은, 러일전쟁 발발 전에는 러시아 군함의 동태를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러일전쟁 발발 후에는 가장된 순양함으로 개조되어 일장기를 달고 전쟁에 참전했다. 말이 참전이지 수송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끝나고 1905년 7월 다시 인천항에 기항했으나 여전히 너무 크고 불편했다. 기관 고장도 잦았다. 1907년 7월 황성신문에 ‘양무호 해원양성소 수기생 모집’ 광고가 난 것을 보면 선원 교육을 위한 해원양성소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1909년 11월 공매에 붙여져 4만2000원에 다시 일본에 팔려나가 이름도 ‘승립호’로 바뀌었다. 이후 주로 중국의 양쯔강~일본 간 화물선으로 운항되다가 1916년경 일본에서 철광석을 적재하고 싱가포르로 운행하던 중 동지나해역에서 침몰했다. 군함 행세 한번 못하다가 운명을 다한 꼴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