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제네바협정 후 친미주의자 고 딘 디엠이 바오 다이 황제를 폐하고 월남을 장악했으나 ‘1956년도에 월남 전 지역에 걸쳐 단일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제네바 협정을 거부해 비난을 샀다. 월맹(북베트남)의 호찌민보다 인기가 없었던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미국은 고 딘 디엠이 월남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도록 막대한 양의 군사물자와 1만7000여 명의 군사지원 고문단을 상주시켰다. 1964년 통킹만 사건 후에는 대규모 지상군까지 파견해 어느덧 군사력이 월남군과 한국군을 합쳐 130만을 넘어섰다.
그러자 사이공 정부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월맹 노동당 정치국 회의가 1967년 일거에 승리를 달성할 새로운 모험을 결의했다. 호찌민과 월맹의 국방장관 지압은 1968년도 구정(舊正)에 총공세를 가해 도시를 중심으로 한 민중봉기를 유발하기로 결정했다. 월맹은 7일 간의 구정휴전을 발표해 미군과 사이공 정부를 안심시켜놓은 뒤 사이공 정부가 구정축제준비에 바쁜 틈을 타 기습공격을 소리없이 준비했다.
공세는 구정인 1968년 1월 31일 미명을 기해 시작됐다. 그들은 미 대사관을 포함해 5개 직할시와 36개 성 등 수십개 촌락을 공격했다. 심리적 효과를 거두기 위한 미 대사관 공격은 그들이 의도한대로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전투상으로는 실패한 전투였다. 1월 31일부터 2월 11일까지 전투에서 참가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3만5000명이 사살되고 5800명이 생포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 언론은 베트콩의 대규모 손실보다 전사 534명과 부상 2547명인 미군의 손실만을 대서특필했다. 이처럼 월맹의 구정공세는 군사적으로는 패배한 전투였지만 오히려 정치·심리적으로는 승리를 거둔 특별한 결전으로 전쟁사에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