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인조, 청나라에 항복… 근세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조선의 치욕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이 정묘호란 발발 9년 만에 또 다시 조선의 국경을 넘으면서 병자호란이 시작됐다.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는 청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 청이 내세운 침략이유였지만, 이는 명분이었을 뿐 사실은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치기 전 배후의 조선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중국 선양을 떠나 10여일 만에 서울 근처에까지 다다르자 인조는 봉림·인평대군 등을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1만3000여 명의 군사와 50여일치의 식량으로 근근히 버티기를 40여일,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의를 상실한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 태종 홍타시에게 항복했다. 근세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조선의 치욕이었다.

이때 척화론자와 주화론자의 대립은 지금도 역사의 교훈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 명에 의리를 지키고 무법자인 청을 배척해야 한다는 척화론의 중심에는 김상헌이 있었고, 명분을 지키려다 임금과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역사의 단절을 초래하는 것보다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론의 중심에는 최명길이 있었다. 한쪽은 현실을 중시하고 또 한쪽은 명분과 의리를 숭상한 것이다. 최명길의 말처럼 “항복문서를 쓰는 사람도, 이를 찢는 사람도 모두 나라를 구한다”는 마음이었지만, 언제나 약소국에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소현세자, 봉림대군 두 왕자와 척화파인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 3학사, 그리고 수만 명에 달하는 많은 백성들이 가족과 생이별하고 만주 땅으로 끌려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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