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전남 진도군이 전국 최초로 미술품 기증·관리 조례안을 제정하게 된 이유는 운림산방이 그곳에 있어서다

↑  운림산방 전경. 운림지 한복판의 작은 섬에 소치 허련이 직접 심은 배롱나무가 보인다. 건물 뒤 산은 첨찰산이다.  전형적인 흙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걷는게 편하다.

 

by 김지지

 

‘한국 남종화(南宗畵) 본향’ 전남 진도군이 미술품 기증과 관리 기준을 담은 조례안을 전국 최초로 마련한다. 진도는 조선시대 남종화 대가 소치 허련, 의재 허백련, 남농 허건 등 다수의 남종화 대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오늘날 전국 남종화 작가 중 절반 이상이 진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종화의 산실은 허련이 진도에 지은 화실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그는 운림산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운림산방을 소개한다.

 

남종화(南宗畵), 주로 현실 참여 기회를 박탈당한 선비들이 무위자연을 그리면서 시작돼

동양화는 북종화와 남종화로 대별된다. 뿌리는 둘 다 중국이다. 북종화는 아름다운 색채와 사실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화풍으로 초상화와 동물화가 주종을 이룬다. 주로 직업적인 화가들이 계승했다. 이에 비해 남종화는 주로 현실 참여 기회를 박탈당한 선비들이 무위자연을 그리면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화가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수묵산수화가 주종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남종화는 유예(遊藝)이지 생활의 수단이 아니었다. 시·서·화(詩·書·畵)에 정통한 문인들이 즐겨 그려 ‘남종문인화’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남종화 화가로는 원말 4대가로 불린 황공망, 예찬, 오진, 왕몽 등이 있다. 일본 난가(南畵)의 뿌리도 남종화다.

우리나라에서 남종화는 허련, 북종화는 장승업을 양대 기둥으로 삼아 발전했다. 장승업 등 조선조 도화서 출신 화원(畵員)들은 숙달된 직업적 기법에 충실했다. 그림은 객관적이고 실증적이고 사실적이었으나 규율에 얽매여 개성을 드러내지 못했다.

반면 정부에 속하지 않은 지방의 화가들은 규율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일정 수준의 화법만 익히면 누구나 자유로웠다.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림은 선비의 멋으로 치부되었고 그림에 사상이나 이념을 담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말의 소치 허련이다. 조정은 정쟁으로 영일이 없고 새로운 서구 사조가 물밀 듯 밀어닥칠 때였다. 결국 꿈을 실현할 수 없었던 소외 계층이나 궁벽한 시골 선비들이 자신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남종화를 받아들였다.

북종화는 북종화 나름대로 전통을 계승했다. 일제의 침략 속에서 비록 왕실이 문을 닫았을망정 조진석, 안중식 계열의 북종화는 새끼를 쳐 김은호와 그 제자들로 이어졌다.

 

허련, ‘근현대 호남 화단의 실질적 종조(宗祖)’

한국 남종화의 뿌리는 허련이다. 그 덕에 오늘날 허련의 고향인 전남 진도군은 ‘한국 남종화의 본향’으로, 그가 진도에 설립한 운림산방은 ‘한국 남종화의 산실’로 불린다.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말도 운림산방에서 비롯되었다. 운림산방이 낳은 대표적 화가로는 설립자 허련(1809~1893)과 그의 아들 미산 허형(1861~1938), 그리고 손자 남농 허건(1908~1987)이 있다. 이른바 ‘운림산방 3대’다. 의재 허백련(1891~1977)은 이들과 같은 집안으로, 혈연으로 따지면 허련의 고손뻘이 되고 법연으로는 허형의 제자다.

허련의 초상화

 

양천 허씨는 경기도에 살다가 허대(1586~1662) 때 진도에 처음 입도했다. 허대는 임해군의 처조카로, 광해군 즉위 후 역모로 몰려 진도로 유배된 임해군을 따라 진도로 들어왔다가 임해군이 사사된 후 그대로 눌러앉았다. 허대의 장남 득생은 진도에서 용, 순, 방 세 아들을 두었다. 허련, 허형, 허건은 둘째 아들 순의 후손이고 허백련은 막내 방의 후손이다.

양천 허씨 집안을 진도의 명문가로 일군 인물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허련이다. 오늘날 ‘근현대 호남 화단의 실질적 종조(宗祖)’로 일컬어지는 허련의 재능을 먼저 알아본 것은 숙부였다. 그는 “조카는 그림으로 일가(一家)를 이룰 것”이라며 어렵게 구한 ‘오륜행실도’를 건네주면서 그것을 베끼도록 했다. 허련은 좋은 화첩이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곳이 어디든 찾아가 베꼈다.

허련은 대흥사의 고승이면서 다도를 정립해 다성(茶聖)이라 추앙받는 초의선사(1786~1866)를 1835년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허련의 재주를 알아본 초의선사는 윤선도의 고택(녹우당)에 있는 숙종 때 화가인 윤두서의 그림을 열람하도록 했다. 허련은 훗날 “윤두서의 그림을 열람한 뒤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허련이 남종화풍을 접한 곳도 녹우당이었다.

초의선사 진영

 

초의선사는 1838년 추사 김정희(1786~1856)에게도 허련의 그림을 보여줬다. 그림을 본 추사는 대번에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격찬했다. 이후 허련은 김정희의 서울 집을 찾아가 그곳에 머무르며 그림을 배웠다.

김정희는 허련에게 ‘작은 어리석음’이라는 뜻의 ‘소치’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남종화에 정통한 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황공망의 호가 ‘대치’인 것에 착안해 대치에 비할 만한 인물이 되라는 의미에서 소치라고 호를 지었던 것이다. 다만 황공망의 ‘큰대’ 자와 비교해 겸양의 뜻으로 ‘작을소’ 자를 썼다.

추사 김정희 초상화. 허련이 그렸다.

 

김정희 집에 머물던 허련은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자 당시로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제주도 바닷길을 세 번이나 왕복했다. 또한 김정희의 가르침대로 붓 하나 들고 산하를 주유하다가 고향에 정착, 49세 때인 1857년 진도에 ‘운림산방’을 완성했다. 허련은 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예찬을 좋아해 예찬의 호인 ‘운림’을 따다가 자신의 거처인 ‘운림산방’의 당호로 사용했다. 그 후 85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운림산방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다.

허련의 대표작 중 하나인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54×106㎝

 

운림산방은 이후 200여 년 동안 5대 직계 화맥(畵脈)이 이어지는 산실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운림산방에는 허련이 손수 심은 배롱나무가 연못 속에서 붉은 꽃을 토해 내는 운림지, 허련의 소박한 화실과 생가, 그리고 소치 기념관이 있다. 운림산방은 1981년 10월 전라남도 지정기념물 5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8월 해제되고 명승 제80호로 승격했다.

허련이 운림산방의 전경을 부채에 그린 ‘운림각도(雲林閣圖), 운림각은 운림산방의 전 이름이다.

 

소치 허련이 만년에 그린 대형 병풍 그림 ‘노송도(老松圖)’. 열 폭 화면에 노송 한 그루가 꽉 차 있다. 눈 덮인 산속에 홀로 우뚝 선 자태는 고고하고, 구불거리는 가지와 둥치의 껍질은 힘이 넘친다.

 

허형, 남도 지방을 ‘예향’으로 불리게 만든 일등 공로자

허련의 화맥은 넷째아들 미산 허형(1861~1938)으로 이어졌다. 허형은 운림산방을 지키며 전문 직업화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생활고 때문에 50세 때인 1912년 상업의 중심지인 전남 강진 병영으로, 1921년 호남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한 목포로 이주했다. 허형은 이처럼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난에서도 벗어나지 못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개척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화업도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다. 다만 아들 허건과 제자 허백련을 키워내고 이들이 각각 목포 유달산과 광주 무등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덕에 남도 지방을 오늘날 ‘예향’으로 불리게 만든 일등 공로자로 꼽힌다.

허형

 

허형의 ‘노매도(老梅圖)’, 63×137㎝, 1893년

 

허건, 형식이나 기교를 앞세우지 않고 소박한 정경들을 담묵담채(淡墨淡彩)로 그려

운림산방 3대를 이은 것은 허형의 두 아들 남농 허건(1908~1987)과 임인 허림(1917~1942)이다. 허건 역시 운림산방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강진 병영을 거쳐 목포에 정착한 후 평생을 목포에서 지냈다. 1930년 제9회 선전에서 첫 입선을 따낸 후 1931년부터 1944년 마지막 선전까지 13회 입선하는 등 작가로서의 기량과 재능이 뛰어났다. 고향의 산야·해촌·산사 등을 가문의 필법인 갈필법으로 그려 냈는데 거친 선으로 빚어낸 소나무의 구성과 생동감 넘치는 필선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다. 1944년의 마지막 선전에서 ‘목포 일우’로 조선총독상을 거머쥐는 영예를 안았으나 경제적으로는 늘 쪼들렸다. 결국 그 무렵 걸린 동상을 치료하지 못해 1945년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아픔을 겪었다.

허건

 

1945년 해방 후에는 일본화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 감각이 물씬 나는 채색화 기법을 버리고 수묵이 강조된 산수에 집중했다. 금강산을 12번이나 다녀오는 등 전국을 여행하며 점묘법, 갈필법 등으로 실경산수를 담아내는 데 힘을 쏟으며 한국화의 토착화에 몰두했다. 그림과 어울리는 글을 함께 적어 풍경의 정취를 강하게 전달했기에 시서화에도 능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남종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화풍이 드러났다. 이런 화풍에 ‘신남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남화란 남종화의 관념 철학에서 벗어나 실체를 바탕으로 주변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양식을 의미한다. 허건은 형식이나 기교를 앞세우지 않고 우리의 정서가 물씬한 소박한 정경들을 담묵담채(淡墨淡彩)로 그려냈다.

허건은 1946년 목포에 남화연구원을 개설하고 1958년 목포문화협회 창립 회장에 추대되어 목포가 신남화의 중심지가 되고 남도 지방이 예향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끔 기반을 다지는 중추 역할을 했다. 그가 목포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그림으로 줄잡아 200명이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사실상 목포 전통미술 동양화의 대부이자 아이콘이었다. 말년에는 일생 동안 수집한 수석 2,000여 점과 선대부터 내려온 서화 골동을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예술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했다.

허건의 ‘삼송도(三松圖), 종이에 수묵담채 131×228㎝, 1974년

 

허건의 동생 허림은 요절한 비운의 작가다. 18세 때 선전에 처녀출품한 뒤 내리 5회 입선하고 부친이 타계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일본 문부성전에 ‘전가’(1941년), ‘6월 무렵’(1942년) 작품으로 내리 입선해 천재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든 유학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25세에 요절했다.

허건은 일찍 세상을 뜬 동생 허림의 아들 허문에게 4대 화맥을 맡겼다. 허문은 생후 11개월 때 부친을 잃고 7살 때부터 백부인 허련의 슬하에서 자랐다. 허문은 수묵의 농담을 이용한 ‘운무산수화’라는 독창적 화풍을 개척했다. 허문 이후 5대 화맥은 허건의 손자인 허재·허전, 허건의 동생들 자식인 허청규·허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허백련, 고집스럽게 남종화 정도 걸어

허백련(1891~1977)은 허건과 22촌 간이다. 남종화의 정도를 고집스럽게 지키며 정신적·기술적 양면에서 단 한 발짝도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종화가들이 남농 허건의 신남화로 변신하는 속에서도 정통 남화의 길을 고독하게 걸어갔다. 그림에 짙은 채색이 없고 화사하지 않아 서민적이고도 토착적이며 은은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평을 들었다. 사군자, 화조(花鳥), 산수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특히 산수화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허백련

 

허백련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8세 무렵부터 당시 진도에 유배 중이던 대학자 정만조에게서 한학을 익히고 10세 때부터 집안의 증조부뻘되는 허형에게서 묵화와 서법을 배웠다. 허백련에게 ‘의재’라는 호를 지어준 정만조가 12년 만에 귀양이 풀려 1908년 상경하자 허백련도 1910년 서울로 올라가 정만조의 집에 기거하며 기호학교(중앙학교의 전신)에 들어갔다. 1912년에는 비상을 꿈꾸며 일본 교토 법정대학(현 리쓰메이칸대)에 입학하고 1년 뒤 도쿄의 메이지대 법과 청강생으로 적을 두었으나 곧 생활고 때문에 포기했다. 도쿄 생활은 경제적으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1915년 자신의 남종화적인 취향과 비슷한 일본 난가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의 문하로 들어갔으나 여전히 먹고사는 게 해결되지 않자 스승의 화실을 나와 전국을 부유하는 떠돌이 화가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 각지의 미술관과 화랑의 그림을 베끼며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았다. 그의 그림을 알아본 어느 시골에서는 그림을 십시일반으로 사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8년 어느 날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는 1920년 목포에서 귀국전을 열고 서울로 올라와 일본 유학시절 그를 격려해준 인촌 김성수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1922년 6월 1일 개회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는 동양화부에 담채화 ‘추경산수’를 출품, 다른 1명의 일본인과 함께 1등상 없는 2등상을 수상했다. 함께 출품한 ‘하경산수’는 입선했다. 당시 서울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김은호가 4등상에 그쳤는데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허백련이 최고상을 받자 서울 화단의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허백련은 선전에 계속 그림을 출품했다. 1923년 5월 제2회 때는 3등상, 1927년 제6회 때는 특선을 차지했다. 그러나 1928년부터는 선전에 더 이상 출품하지 않고 전시회를 열거나 후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화업을 이어갔다. 1932년 7월 김은호와 함께 서울 미쓰코시 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에서 2인전을 열고 1940년 5월 서울의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10 명가(名家) 산수화전에 동참했다. 10 명가전에는 허백련을 비롯해 고희동·김은호·노수현·박승무·변관식·이상범·이용우·이한복·최우석이 참여했다.

허백련의 ‘추경산수(秋景山水), 131×38㎝, 1933년

 

허백련은 후학을 지도하기 위해 1936년 2월 동양화가 김은호, 서양화가 박광진, 조각가 김복진과 함께 조선미술원을 창립했으나 결국에는 운영난을 견디지 못해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허백련은 호남 서화계의 후진을 양성하고 서화 교양의 도량으로 활용할 ‘연진회’를 1938년 광주에 개설했다. 광주는 1924년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다.

1955년 국전 4회 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1961년 10회까지 7회에 걸쳐 심사위원을 지냈다. 1974년 12월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으로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무등산에 단군신전 ‘개천궁’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열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77년 2월 15일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단군신전 계획은 무산되었고 조선조 말부터 화려하게 꽃피운 남종 산수화의 전성기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 운림산방 아래 첨찰산이 궁금하면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