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⑮] 피렌체(5)와 피사 : 니콜로 마키아벨리, 체사레 보르자, 피사 대성당, 피사 세례당, 피사 종탑
2019년 7월 16일 · zznz
↑ 피사 두오모 광장 전경. 아래쪽에서 위쪽 순으로 피사의 사탑, 피사 두오모, 산 조반니 세례당이고 두오모 오른쪽은 납골당(캄포산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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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희망하며 ‘군주론’ 집필
피렌체에는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생가도 있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를 건너 피티 궁전으로 향하는 거리 중간 쯤 오른쪽에 있다. 베키오 다리에서 1분, 시뇨리아 광장에서 5분 거리다.
마키아벨리는 1469년 구이차르디니 거리 18번지에서 태어났으나 당시 생가는 남아 있지 않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 중에 파괴되었다. 대신 건물 입구 위쪽 들보에 적혀 있는 “이 들보는 1944년의 파괴 직후에 발견된 것으로 마키아벨리의 집에 사용되었던 것이다”라는 문장만이 마키아벨리의 생가임을 알려주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집안은 나름 명망가이고 아버지는 법률가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사실상 독학으로 공부해 29세 때 피렌체 정부의 공무원으로 발탁되었다. 당시는 피렌체의 정치와 행정을 오랫동안 쥐락펴락하던 메디치 가문이 타지로 망명한 후 피렌체 정부가 공화정을 선포하고 피에로 소데리니가 ‘곤팔로니에레(행정·사법 수반)’로 피렌체를 이끌던 때였다.
마키아벨리는 14년 동안 내무, 병무, 외교 등의 공무를 맡아 유럽의 여러 나라를 두루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유럽을 쥐고 흔든 인물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샤를 8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5개월간 주재할 때는 왕권이 강해지고 안정화되는 프랑스를 살펴보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통치하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는 어정쩡한 제국의 문제점을 간파했다. 로마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지켜보았고, 이탈리아에 교황국을 세우려는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처럼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이 권력자였던 적은 없었지만 권력의 핵심 가까이에서 많은 권력자들을 만나 권력의 속성을 속속들이 체험했다. 다만 공직생활은 운명의 여신이 그를 비껴가 오래 하지 못했다. 이유는 이랬다.
1512년, 교황이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대결했다. 이 때문에 친 프랑스적인 피렌체는 스페인군에게 점령되었다. 스페인은 사보나롤라 때문에 피렌체를 떠나 있던 옛 지배자 메디치 가문을 복귀시켰다. 그 덕에 1512년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는 사실상 독재적으로 피렌체를 다스리는 옛 체제를 되살리고 기존의 공화정부 참여자를 숙청했다. 소데리니 정부에서 공직자로 활동한 마키아벨리 역시 해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513년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투옥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혐의를 부인해 곧바로 석방되었다.
많은 권력자들을 만나 권력의 속성을 속속들이 체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교외의 농장으로 물러나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고전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전술론’, ‘로마사 논고’ 등의 저작을 집필했다. 그는 혼란에 빠진 이탈리아를 통일할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희망했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와 자신의 외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군주상을 그려나갔다. 그 산물이 ‘군주론’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당시 유럽은 신학적 국가 통일체에서 벗어나 서서히 국민 국가를 형성해 나가던 시대였다. 그런데도 옛 로마제국 시절 서구 세계 전체를 지배했던 이탈리아 반도만은 분열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분열과 혼란은 중세 유럽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는 비록 강력하지는 못해도 어엿한 왕이 있었고 그 왕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가 결속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그런 구심점 없이 대표적인 5개 도시국가로 갈라졌다. 이탈리아는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대립하고 전쟁을 벌였다. 정치체제도 군주국, 공화국, 신정 정치체제 등 다양했다. 결국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맥을 못 추는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이런 분열과 혼란을 종식시키려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군주의 통치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지러운 이탈리아의 정세 속에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려면 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면 때로는 냉혹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가 볼 때 이런 조건에 부합한 인물이 체사레 보르자여서 ‘군주론’의 모델로 삼았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권력을 획득하려면 군주는 잔혹하다는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에게 잔혹하면서 단호한 체사레 보르자는 이탈리아 통일을 이뤄낼 영웅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마키아벨리 눈에 체사레는 강력한 리더십과 차가운 이성을 지닌 군주의 전형이었다. 날카롭고 기민한 결단력,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잔혹한 짓도 되돌아보지 않고 실행하는 그를 보며 통일 이탈리아를 이룰 수 있는 유능한 군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는 체사레에게 실망했다. 체사레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거듭하다가 끝내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론’에서도 체사레를 거론할 때는 “교황의 아들로 태어난 운에 너무 의존했다”고 차갑게 평가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