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딘 애치슨, ‘애치슨 선언’ 발표

2차대전 후 냉전이 몰아치면서 미국의 관심은 소련과의 전면전 대비였다. 소련이 전면전을 감행할 경우 극동에서는 주한 미군 2개 사단과 주일 미군 4개 사단으로 45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쪽으로 비상전쟁계획안이 마련되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이 날 경우 주한미군 2개 사단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차단할 수 없으므로 주한미군도 일본으로 철수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1949년 10월에는 마오쩌둥의 인민정부가 중국에 수립된 터라 이 지역을 둘러싸고 위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미국 프레스센터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미국 정책의 한 시험대’라는 연설을 통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과 대만 등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을 의미했고,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는 지역은 미국이 군사적 안전보장을 약속할 수 없으며 방위의 1차 책임은 당사국과 국제연합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흔히 ‘애치슨 선언’으로 불린 연설 내용이 알려지자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 주미대사에게 미 국무성 동북아시아 차관보를 만나 한국정부 내에 팽배해 있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하도록 했으며 애치슨에게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에 한국을 포함시켜 달라”고 요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6·25를 부른 초대장이 되었다는 전통적인 시각과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미 행정부 강경파의 음모라는 주장처럼 애치슨 선언을 6·25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한편에서는 북한이 이미 1949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기 때문에 애치슨 선언과 전쟁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애치슨 자신은 훗날 회고록에서 “나의 주된 관심은 중국이었다”며 6·25와 무관함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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