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윤봉길 의사 순국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형무소. 2명의 일본군이 10m 거리에서 목표물을 향해 조준사격자세를 취하고, 이어진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사형수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검안의가 절명을 확인한 시간은 13분 뒤인 7시40분. 스물다섯의 청년 윤봉길은, 장제스 중국 총통의 말마따나 “중국군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감히 해내고 이렇게 숨져갔다. 분이 안풀렸는지 일제는 시신을 인근 쓰레기 하치장에 암매장했다.

8개월 전인 4월29일 일본군은 상하이사변의 승전과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잔치인 ‘천장절(天長節)’을 기념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윤봉길도 폭탄이 든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인파속에 몸을 숨겼다.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긴 채 고향 예산을 떠난지 어느덧 2년. 이봉창 의사가 3개월 전 적지 일본 땅에서 천황을 향해 던진 폭탄이 불발로 그친 사건을 되씹으며 윤봉길은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단상위로 힘껏 던졌다. 폭발음과 함께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과 9사단장 등 군수뇌부 등 10여명이 크게 다쳤다.

자결에 실패한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으로 압송됐다. 당초 일본군은 윤봉길을 훙커우 공원에서 공개처형하려 했으나 자칫 국제적인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고 그로인해 국제여론이 비등해질 것을 우려해 일본 내 처형을 결정했다. 시신은 해방 후인 1946년 5월 순국 14년만에 가나자와에서 봉환돼 효창공원 묘소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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