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YWCA 위장 결혼식…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보궐선거 저지 국민대회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후, 정국은 한동안 ‘정중동’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박 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유신 세력들의 발호로 다시 유신체제가 이어질 것인지 도무지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유신을 반대해온 재야인사들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비관론과 낙관론이 엇갈렸으나 11월 10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실시방침이 발표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후보로 나설 것이 분명해지면서 논의는 자연스럽게 비관론으로 기울었다. ‘유신잔재로 유신종식이 가능하다’는 논리의 허구성이 공감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중심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권은 상황을 다르게 보았다. ‘최규하 대통령 대행 체제 하에서 직선제 개헌을 추진해야지 자칫하면 군부가 나온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비관론자들은 정치권의 외면 속에서 반정부 집회를 준비했고, 계엄 하에서 사람을 모으는 데는 결혼식이 제격이었다. 1979년 11월 24일 윤보선 함석헌 김병걸 백기완 등 1000여 명의 재야인사들이 서울 YWCA 강당에 모여들었다. 결혼식으로 가장한 ‘보궐선거저지 국민대회’였다.

이윽고 오후 5시45분, “신랑입장”이라는 사회자의 개회 선언을 신호로 대회장 곳곳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사반대”라는 구호가 터져나왔다. 곧 전투경찰이 들이닥쳤고 대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잡혀가는 사람도 잡아가는 사람도 여전히 앞날을 확신할 수 없어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었다. 연행된 사람들은 “세상이 달라졌는데 이게 뭐냐”며 큰소리를 쳤고 경찰들은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며 이들을 달랬다. 으레 있어야 할 조서작성도 없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경찰서에 연행된 사람들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구타와 고문을 당하면서 상황이 분명해졌다. 낙관론은 역시 ‘헛된 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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