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 황성신문에 실려

“아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타국인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3일이 지난 1905년 11월 20일, 을사조약을 통렬히 비판하는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날을 목놓아 우노라)’이 자신이 주필 겸 사장으로 있는 황성신문에 실렸다.

황성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을사 5적’을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한 이 논설을 널리 알리기 위해 평소 발행부수 3000부보다 훨씬 더 많은 1만 부를 발행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경찰이 그날 새벽 신문사를 급습했을 때 장지연은 사환과 함께 술을 마시며 그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장지연은 곧 체포되었고 신문은 무기정간을 당했다.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했다는 것이 장지연에게 씌어진 죄목이었다.

장지연은 64일 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뒤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가 이듬해 귀국, 1909년 10월 창간된 경남일보 초대 주필로 언론인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병 후인 1910년 10월 11일자 경남일보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순국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실어 경남일보마저 정간조치당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경남일보는 10일 만에 복간됐고 장지연은 그대로 주필 자리에 있었다. 이후의 경남일보 논조는 친일로 급변했고 장지연 역시 1913년 경남일보를 떠나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한 매일신보에 친일논조의 기명기사를 올려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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