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안동 기행 (上) : 도산서원, 퇴계 이황, 시사단, 월영교, 원이엄마 편지

↑ 도산서원 (출처 도산서원 홈페이지)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2019년 7월 22일과 23일 양일간 20년 만에 안동 여행을 했다. 나는 과거에 ‘선비의 고장’, ‘유학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안동을 두 번 여행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새 사위가 자신 있게 코스를 준비하고 장인 장모를 초청해서 오랜만에 훌륭한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사위는 경주 출신이지만 안동권씨라서 안동에 더 자부심과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때마침 우리나라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그 가치를 드높인 시점에서 한 안동 여행이라 시의적절했다.

2019년 6월 6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년)에 건립한 조선 첫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안향)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이황), 병산서원(류성룡), 경주 옥산서원(이언적), 대구 달성 도동서원(김굉필), 경남 함양 남계서원(정여창), 전남 장성 필암서원(김인후), 전북 정읍 무성서원(최치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김장생) 9곳이다.

 

도선서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은 것은 우람한 고목들

안동 도착 후 제일 먼저 도산서원을 찾아갔다. 안동에 갈 때 마다 찾는 곳이다. 역사를 증명하듯이 먼저 우람한 고목들이 서원 입구에서 우리를 맞았다. 신령한 서기를 뿜는 왕버들이 옆 산의 그늘 때문에 햇빛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위로 자라기를 포기하고 햇빛이 조금이라도 오래 머무는 곳을 향해서 땅 위 1미터 높이로 옆으로 뻗어나가며 버텨온 400년 세월의 삶을 알몸으로 보여준다. 감동이다. 한 뿌리에서 솟은 듯한 거대한 느티나무 4형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도산서원 앞의 왕버들  (출처 도산서원 홈페이지)

 

도산서원의 나무와 관련한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서원 안에는 수령이 400년이나 되는 회화나무도 한 그루 있었는데 2001년에 말라 죽었다. 이 사건으로 도산서원을 관리하는 안동시청 공무원들이 엄청난 원성에 시달렸다고 한다.

서원 앞마당에는 금송(金松) 한 그루도 우뚝 솟아 있다. 이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이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 준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0년 12월 청와대 집무실 앞에 있던 것을 서원 경내에 옮겨 심었다가 2년 만에 말라죽자 당시 안동군이 같은 수종을 구해 몰래 그 자리에 심은 것인데, 금송이 일본에서 일왕을 상징하는 일본 왕궁의 조경수라는 여론이 일자 2018년 11월 서원의 담장 밖 현재 위치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박대통령 각하 기념식수’ 표지판은 떼어 없앤 듯 보이지 않았다.

서원을 감싸 돌며 흘러가는 강물은 마침 장마철이어서 시원한 물소리로 합창을 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 건너 논과 밭에 둥글게 솟아있는 언덕이 시선을 끈다. 정조가 퇴계 이황을 흠모하여 정조 16년(1792년)에 특별과거시험인 도산별과(陶山別科) 과거를 실시한 곳이다. 그래서 송림 사이의 단 이름이 시사단(試士壇)이다. 7000명이 넘는 유생들이 과거에 응시했다고 하니 당대로서는 대단한 이벤트였을 것이다.

안동댐 공사로 이 지역이 수몰될 위험에 처하자 약 10m 높이의 축대를 쌓아올리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서원 앞의 평범한 시골 들판에 확실한 포인트를 주는 오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시사단 (출처 도산서원 홈페이지)

 

시원한 풍경을 뒤로 하고 서원의 나지막한 대문으로 들어섰다. 다소 겸손한 규모의 대문을 들어서면 오밀조밀하게 반듯하게 배치된 작은 건물들이 경사지를 따라 올라가며 정갈하게 자리하고 있다. 퇴계가 건립한 자그마한 서당과 부속건물에 퇴계 사후에 후학들의 공부 공간과 제사 공간이 더해진 건축물 집단인데도 퇴계라는 위대한 인물과 비교하면 소박하고 단촐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도산서당을 지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 가르쳐

도산서원의 주인공은 퇴계 이황이다. 그는 새로운 세기가 열리는 1501년(연산군 7년) 안동시 도산면 은혜리에서 태어나 1570년(선조 3년) 작고했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퇴계 이황 표준 영정 (세로120㎝ X 가로80㎝)

 

퇴계는 인생의 황혼기인 1561년에 도산서당을 4년에 걸쳐 짓고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서당은 세 칸으로 지었다. 동쪽 칸은 사방이 트인 마루로 암서헌(巖栖軒), 가운데 칸은 퇴계가 직접 거처하던 온돌방으로 완락재(玩樂齋)라 명명했다. 성현들의 책을 방에 가득 쌓아놓고도 정작 본인은 몸 하나 겨우 누일만한 작은 공간에서 잠을 잤다. 서쪽 칸은 부엌이다. 서당 앞에 자그마한 연못(정우당)과 우물(몽천)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도산서당이 있고, 왼쪽에 농운정사(隴雲精舍)가 있다.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제자들이 공부에 열중하라는 뜻에서 工자 모양으로 건축했다. 동편 마루는 공부하는 공간으로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서편 마루는 휴식 공간으로 관란헌(觀瀾軒)이라 하였다.

서원 내에서 퇴계 생존 시에 있던 건물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그리고 역락서재(亦樂書齋)이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지헌의 아버지가 지헌을 취학시키면서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도산서원 배치도 (출처 도산서원 홈페이지)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4년 만인 157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뜻을 모아 도산서당 위쪽으로 건물을 배치하며 서원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시대 서원은 학문 연구와 선현에 대한 제향을 위하여 지방 선비들이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이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를 중심길로 삼아 쌓아올린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서원의 중심이 되는 전교당(典敎堂, 대강당)이 있다. 그곳에 선조 임금이 내린 한석봉 친필 ‘도산서원’ 사액현판이 걸려있다. 여기엔 일화가 있다.

1575년 선조가 당대 최고 명필 한석봉(1543~1605)을 불렀다. 사액(賜額·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림) 서원에 보낼 글씨를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르는 대로 받아만 쓰라고 했다. ‘원’-‘서’-‘산’ 한석봉은 열심히 받아 썼다. 마지막 글자는 ‘도’. 그제야 자신이 쓰는 것이 ‘도산서원’임을 알았다. 선조는 ‘천하의 한석봉도 도산서원 현판이란 사실을 알면 붓이 떨려 현판을 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단어를 거꾸로 부른 것이었다. 도산서원 현판 글씨의 마지막 자가 오른쪽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듯 보이는 유래다. 지금 도산서원에 걸려 있는 현판은 모사본이다. 진품은 안동 국학진흥원에 있다.

전교당 좌우에 유생들의 공부방(東齋, 西齋)과 서고(光明室)가 좌우 대칭으로 나뉘어 있다. 동재(東齋)는 박약재(博約齋), 서재(西齋)는 홍의재(弘毅齋)라 한다. 책을 보관하는 광명실도 동서로 나뉘어져 있는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공중에 떠있다. 동재 옆에는 책을 찍어내는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서원의 제일 위쪽 동편으로 퇴계 선생과 그의 제자인 조목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는 상덕사(尙德祀)가 있다. 그 외에 서원 관리자들의 살림집인 고직사(庫直舍)가 제법 크게 아래 위에 두 군데 있고, 유물전시관 옥진각에는 퇴계와 서원에 관한 설명과 유품들과 전적류가 전시되어 있다.

위는 한석봉의 친필인 ‘도선서원(陶山書院)’ 편액이고 아래는 퇴계의 친필인 ‘역락서재(亦樂書齋)’ 편액이다.

 

퇴계는 매화를 사랑해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이라는 존칭으로 대해

서원의 건물들 사이에는 여러 수목이 있는데 특히 매화나무가 많다. 고매(古梅)는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보아 퇴계가 보던 매화는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퇴계는 매화를 무척 사랑해서 그냥 매화라 하지 않고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이라는 존칭으로 대했다고 한다. 퇴계는 죽기 전 마지막에 남긴 말도 “매형(梅兄)에게 물 잘 주라”고 하였단다.

도산서원에 핀 매화 (출처 도산서원 홈페이지)

 

우리나라 화폐 1000원권 구권에는 퇴계선생의 얼굴(앞면)과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한 서원 전경(뒷면)이 그려져 있었으나 2006년 새로 발행된 1000원권 신권의 뒷면은 도산서당이 산수화로 바뀌었다. 겸재 정선의 말년 작품인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다. 그림 한 가운데에 정자 같은 건물 안에 앉아있는 선비가 퇴계라고 한다.

그런데 신권 화폐가 발행되자 이 그림이 도산서당이냐 아니면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기 전에 세운 계상서당이냐 하는 논란이 생겼다. 계상서당은 초가였는데 이 그림은 초가가 아니고 풍경도 도산서당에 가깝다고 하여 작가의 제목 ‘계상정거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도산서당 계곡의 풍경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1000원권. 위는 도산서원이 그려진 구권이고 아래는 ‘계상정거도’가 그려진 신권이다.

 

도산서원을 둘러보고 안동의 명물 식사인 헛제삿밥을 점심으로 먹었다. 유교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제삿밥 메뉴를 간소화해서 차려주는 독특한 메뉴이다. 20여 년 전에 먹었던 까치구멍집을 찾았으나 생소하고 거대한 식당으로 변해서 낯설었다. 밥을 먹고 나서 식당을 나와 주변을 살펴보니 식당 앞의 강 건너 마을에 있던 옛집들에서 식당을 하던 가게들은 모두 강 건너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현대식 식당가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어 제삿밥을 먹는 정취는 사라지고 메뉴만 남아 상업행위에 이용되고 있었다.

또 하나 변한 것은 안동호 물길을 가로 지르는 길이 387m의 목책 인도교 월영교(月映橋)가 2003년에 건설되고 다리 한가운데에 월영정(月映亭)이 있어서 멋을 더해주고 있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월영교를 건너가면 좌측으로 옛날 헛제삿밥 식당이 있던 마을을 단장한 ‘안동민속촌’이 있고, 우측으로는 ‘안동호반나들이길’이 데크길로 호수변을 따라 정비되어 있다.

월영교

 

수백 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무덤 속에 있다가 세상에 모습 드러낸 원이엄마 편지 심금 울려

호반 데크길로 접어들자 ‘원이엄마’라는 어디서 들어본 글자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안내문을 보니 조선 중기에 살다가 일찍 남편을 여읜 원이엄마가 남편의 관에 써 넣은 편지가 시신과 함께 썩지 않고 이장 중에 발견되어 세상에 널리 회자된 애닯은 사연을 엮어 관광지로 조성한 것이다. 고어체 한글 편지의 전문을 현대어로 바꾸면 아래의 내용이다.

 

원이 아버님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갖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그토록 절절하게 사랑했던 지아비가 세상을 떠난 황망한 와중에 뱃속에 아이까지 품은 젊은 아낙이 어느 틈에 먹을 갈아서 이토록 절절한 편지를 쓸 수 있었을까? 지아비에 대한 절절한 정한을 써 나가다가 끝내지 못하고 종이가 다하자 모서리를 돌려 써 내려 갔다.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자 아낙은 다시 편지의 앞 여백으로 돌아와 거꾸로 마지막 줄을 적어 나갔다.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글귀가 특히 심금을 울린다.

원이엄마 편지 (가로 58.5㎝, 세로 34㎝)

 

1998년, 경북 안동시 정상동 야산은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분묘 이장 작업이 한창이었다. 연고가 있는 무덤들은 후손들이 이장을 하지만 무연고 묘들은 안동대 박물관측이 발굴을 맡기로 했다. 고성이씨 문중이 파헤친 한 무덤이 수백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어 안동대 박물관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유물을 절반쯤 수습했을 무렵 망자의 가슴에 덮인 한지(韓紙)를 조심스럽게 벗겨서 돌려 보니 한글로 쓴 편지가 있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로 58.5㎝, 세로 34㎝의 편지 외면에는 ‘원이 아버님께’ 라는 짤막한 글로 수신자를 대신했고 당시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라 내면에는 구구절절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이 시계 방향으로 여백 하나를 남겨두지 않은 채 빽빽한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부부의 호칭은 ‘자내’… 그 시대에 남녀가 대등한 관계였음을 시사

이 편지 외에도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유물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았지만 겉을 싸고 있던 한지를 찬찬히 벗겨 내자 미투리(삼이나 모시 등으로 만든 신발)가 드러났다. 자세한 검사 결과 미투리 재료는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은 까닭은 신발을 싸고 있던 한지에서 밝혀졌다. 한지는 많이 훼손되어 글을 드문드문 읽을 수 있었다. “내 머리 버혀… (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그리고 끝에는 “이 신 신어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내용들이 얼핏얼핏 보였다. 편지를 쓸 당시 병석에 있던 남편이 다시 건강해져 이 미투리를 신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를 풀어 미투리를 삼았던 것이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이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은 것이다.

병석에 있던 남편이 다시 건강해져 이 미투리를 신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원이엄마가 머리를 풀어 만든 미투리

 

유물 중엔 아내의 편지 외에도 2편의 시와 11통의 서신이 있었다. 편지들 가운데 9통은 망자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모두 묻힌 이가 죽기 1년 전에 쓴 것들이다. 한문 초서로 흘려 쓴 이 편지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발견 되었다. 아들 응태에게 부치는 편지(子應台寄書)에서 피장자의 이름이 응태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31년 아우와 함께했다’는 형의 글에서 묻힌 이가 서른한 살에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물에서 확인한 단서를 정리하면 묻힌 이는 고성이씨 가문의 응태라는 남자였고 그에겐 형이 있었으며 서른한 살(1586년)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이다.

이 편지는 자내(자네)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아내가 남편을 자내(자네)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내다려 내 닐오되(당신에게 내가 말하기를)… 자내 몬저 가시난고(당신 먼저 가시나요)…” 등 이응태의 처는 남편을 가리켜 ‘자내’라는 말을 모두 14번 사용했다. 따라서 이응태 처의 편지로 임진왜란 전까지 부부가 서로 ‘자내’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살던 시대에 남녀가 대등한 관계였음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400여 년 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의 고이 묻어둔 사랑이 오늘날 빛을 받아 현대인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다소 유치한 ‘원이엄마 테마거리’였지만 귀중한 부부의 사랑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것으로 고맙게 여긴다.

 

안동 기행(하)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