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안동 기행 (下) : 임청각, 법흥사지 칠층전탑, 하회마을, 부용대, 옥연정사, 겸암정사, 만송정, 지산고택, 소수서원

↑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by 김정일

前 금융인·뭐라도학교 교장, 現 소나무 농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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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은 만주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

원이엄마길을 잠깐 걷는 중에 주변 안내 팻말에서 한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임청각 2㎞’. 내가 임청각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하고서였다.

문 대통령은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에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해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다.’라고 소개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가의 산실이고, 대한민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다. 아흔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나 그대로다. 이상용 선생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를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독립운동가를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새롭게 하겠다며 최고의 존경과 예우로 보답하겠다고 했다. 독립운동가의 삼 대까지 예우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전 계획에 없었지만 그 현장을 안 가 볼 수가 없다. 도로에서 철길 아래 작은 터널을 지나 임청각 앞으로 가니 정문 옆에 만발한 무궁화꽃이 우리를 반겨맞는다. 5개 흰 꽃잎의 가운데가 진한 자주색을 띄고 있었는데 흔히 보는 무궁화와는 달라서 인상적이었다.

임청각은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1519년 낙향하여 지은 고성이씨의 종택이다. 원이아빠 이응태와 같은 고성이씨를 뜻밖에 또 만났다. 보물 132호인 임청각은 사당과 별당형 정자 군자정, 본체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을 끼고 조화롭게 자리잡았다.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 석주 이상룡 선생께서는 만주로 떠나면서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어 이 집의 사당은 신위가 없는 사당이 되었다.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일제 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했던 이상룡 선생이 1932년 만주에서 순국하시면서 남기신 말씀이다. 집의 규모나 건축미보다 서슬이 퍼런 진정한 애국지사의 결기가 느껴졌다.

임청각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수백 년 견뎌낸 법흥사지 칠층전탑

임청각을 나서니 가까이에 커다란 탑이 보인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본 적이 있는 다소 생경하게 큰 탑이다. 정식 명칭은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불탑으로 국보 제16호다. 높이가 17m인 한국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전탑이다. 벽돌로 만든 전탑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다. 유명한 경주의 분황사 모전탑처럼 탑이 있던 사찰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탑만 남아 있으니 이게 전탑의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의 기단에는 검게 그을었지만 지금도 완연한 사천왕상 등의 조상(彫像)이 새겨진 화강암 판석이 1면에 6매씩 배치되어 있다. 거대한 사찰마저 사라져버린 자리에 허물어지기 쉬운 탑이 수백 년을 견디며 남아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인데, 아마도 기도의 대상인 탑의 존재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천년 세월의 무게에도, 손을 내밀면 닿을만한 거리에서 육중한 열차가 덜거덕거리며 지축을 흔들어대는데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탑을 향한 간절한 기원의 손길들을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본다.

법흥사지 칠층전탑. 오른쪽은 탑의 기단에 새겨진 사천왕상 조상.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다시 차를 타고 요즘 젊은이들의 여행 트렌드를 따라 아이들이 미리 조사한 안동 명품 가게 순례를 했다. 안동소주박물관, 버버리찰떡, 맘모스제과점 등이 안동의 ‘must-visit’ 명소란다.

안동소주박물관은 안동소주 공장 건물 안에 있다. 소주 박물관이라기 보다는 한국 전통음식 박물관에 가깝다. 우리 전통음식 명인이자 증류식 소주 제조 기능보유자인 조옥화 여사가 박물관을 운영한다. 박물관은 전통음식 위주로 전시되어 있다. 마지막에 안동소주를 시음하고 구매하는 방이 있다. 버버리찰떡집과 맘모스제과점도 들러서 찰떡과 빵을 구입했다.

 

하회마을은 400년 된 양반 대갓집들의 마을

이제 숙소가 있는 하회마을로 간다. 낙동강 물길이 멋지게 휘감아 돌아나가는 가운데에 400여 년 전 자리 잡은 양반 대갓집들의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 류성룡이 살던 마을, 하회탈춤의 멋과 해학을 보존하고 있는 마을,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세계적인 문화재 마을이다.

하회마을로 들어서기 전, 마을을 휘감아 도는 물줄기를 감싸 안으며 같이 흘러가는 바위 절벽산에 부용대(芙蓉臺)가 있다. 입구에 있는 화천서원(花川書院) 겸 카페 앞에 주차하고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화회마을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산등성이에 부용대가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한다. 해발 64m의 낮은 바위절벽이지만 마을 쪽에서 바라보면 꽤나 높아 보이는 암산이다. 부용대에서 바라보면 화회마을이 시원하게 펼쳐있다. 산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에 섶다리를 놓아서 볼거리를 늘려준다. 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데 머리카락이 바람 따라 흩날리는 모습이 사진에 잡혀 독특한 포즈를 자아낸다.

부용대 아래에 옥연정사(玉淵精舍)와 겸암정사(謙巖精舍)가 가까이 있다. 옥연정사의 첫 이름은 1586년 서애 류성룡이 지은 옥연서당이다. 서애는 이곳에서 우리 민족 최고의 수난사인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겸암정사는 류성룡의 친형인 겸암 류운룡이 1567년 세웠다. 부용대 서쪽 강의 흐름이 크게 감돌아 굽이치는 화천 상류에 남향으로 지어졌다. 하회에서 가장 전망좋은 집 중 하나다. 부용대 입구의 화천서원(花川書院)은 류운룡 선생을 흠모하여 배향한 서원이다. 고종 5년에 취해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96년 건물을 복원하였다.

옥연정사

 

화천서원을 둘러본 후 옥연정사로 향했다. 옛날에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왔고 이번에는 뒷산에서 내려왔는데 아름다운 경치와 정갈한 건물은 그대로였다. 옥연정사 앞 부용대에서 바라보던 섶다리로 내려가려하니 관리인이 “오늘은 요 며칠간 내린 비로 물이 불어서 섶다리를 통제하므로 건너갈 수가 없다”고 한다. 할 수없이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돌아서 하회마을 입구로 갔다.

섶다리

 

하회마을은 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내려 동네에서 운영하는 전기차나 셔틀버스를 타던가 아니면 걸어서 가야한다. 우리는 마을 안 고택을 숙소로 예약한 덕분에 차를 타고 우리의 숙소인 지산고택(志山古宅)까지 갈 수 있었다.

하회마을 초입에 있는 지산고택을 보는 순간 탄성이 터져나왔다. 상상했던 한옥 마당과는 전혀 다르게 대문 앞 파란 잔디가 너른 마당 가득히 석양에 반짝이며 우리를 맞이한 까닭이다. 고택은 ‘ㄷ’자 형의 안채와 ‘-’자 형의 문간채 그리고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은 승정원 우승지, 사간원 대사간, 안동부사를 지낸 류지영 선생이 1841년 하회마을의 대표적 고가 중 하나인 염행당(念行堂)에서 분가할 때 분재받은 건물로 당호는 ‘존양당(存養堂)’이다. 마음을 지키고 성품을 가꾼다는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사표로 삼은 선생의 뜻을 표현한 당호이다.

우리가 하룻밤을 머문 지산고택. 가운데가 사랑채 ‘지산서루’이고 오르쪽이 문간채 초가다.

 

우리가 머물 방은 너른 잔디 마당을 내다보는 사랑채 ‘지산서루(志山書樓)’와 문간채 한 칸이다. 딸네가 잘 문간방 초가집은 안채를 마주보고 있다. 안채 쪽 쪽문은 100도로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만큼 창호문이 낮다. 방은 둘이 곱게 누워야 겨우 잘 수 있을 만큼 앙징스러운 크기였다. 사랑채엔 넓은 마루가 있어서 낮에 사 온 안동소주와 닭튀김으로 간단한 회포를 풀고 유서 깊은 대감댁에서 하룻밤 고요히 잠을 잤다.

 

굳게 닫힌 지산고택의 소슬대문, 대갓집의 권위 살려

새소리에 일찍 잠을 깨서 아름다운 정원을 구석구석 감상하고 주인이 내준 인절미와 커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하회마을 투어에 나섰다. 한여름 햇볕이 뜨겁고 갈 길이 바쁜 까닭에 한옥 구경은 무늬만 구경하기로 작정하고 휘휘 둘러보았다.

뭐니뭐니 해도 대갓집의 권위는 굳게 닫힌 소슬대문이다. 자유분방한 질서인 자연 석벽 기초 위에 엄격한 질서인 검은 벽돌이 몇 겹 쌓이고 그 위에 꼼꼼하게 짜인 창살과 창틀이 분위기를 잡는 중에 육중한 검은 기왓골이 확고하게 요지부동의 구도를 마감한다. 이런 평면의 질서를 좌우로 거느리고 양다리를 힘차게 딛고 선 듯 당당한 기둥 위로 솟아있으니 집주인의 권위를 대변하는 듯 하다.

한옥의 아름다운 맵시와 편안함을 건성건성 보면서 발길 닿는 대로 돌담길로 이어진 골목길을 몇 굽이 돌아나가니 언제 어디서나 그 기품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우리 소나무 숲이 강가에 펼쳐져 있다. 만송정(萬松亭)이다.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모래 퇴적층에 심은 장송 백여 그루가 제각각의 자태로 마을에 서기(瑞氣)를 뿜어주고 있는 듯 시원하다. 이 소나무숲은 200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만송정

 

만송정 앞길을 걷다보니 마을로 이어지는 길목에 푸른 솔잎을 반구형으로 치장한 노송이 눈에 띈다. 길게 뻗어나간 가지를 받쳐드는게 힘들어 보였는지 양쪽에 받침목을 세워놓았다. 400년 세월의 질곡이 구불구불한 가지에 기록되어 있건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오늘도 가지마다 송송송 매달린 솔잎에 물과 영양을 공급하며 마치 찬란한 훈장을 매단 듯 의연한 자태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송을 지나 마을 골목을 한 굽이 돌아드니 숨어있던 당산나무가 웃으며 나타난다. 흰 실 벙거지를 뒤집어쓴 남자 장승은 시원한 웃음으로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고 있었다. 600년 간 이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는 세속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신성한 영역을 굵고 흰 실로 구분 짓고 자신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동물과는 달리 나이를 먹을수록 멋과 권위가 더해지는 고목은 수백 년 세월의 더께 속에 세상의 길흉화복 데이터를 모두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식견이 짧아 불안한 인간들에게 삶의 비밀을 하나하나 가르쳐 줄 수 있는 영험을 지니고 있을 듯하다.

이 느티나무는 둘러보는 방향에 따라 두 그루 혹은 다섯 그루로 보이기도 하는데 결국 한 뿌리로 생각된다. 하회마을을 자세히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고목인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기를 받아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한 여름 한 낮의 뜨거운 열기를 피해 마을 구경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400년 수령의 노송(왼쪽)과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병산서원의 백미는 만대루

오늘 여행의 핵심은 병산서원(屏山書院)이다. 나는 안동을 두 번 방문했지만 웬일인지 병산서원과는 인연이 없었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강을 따라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우리는 차로 산을 빙 돌아 서원에 도착했다. 서원은 산에 붙어 흐르는 낙동강을 가까이서 내려다 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 주변에는 한여름에 만발하는 배롱나무 꽃들이 도열해 있다. 서원의 대문인 복례문(復禮門) 앞에서는 젊은 나무가, 주건물인 입교당(立敎堂) 뒤로는 늙은 나무들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축하하는 현수막도 걸려있다. 입구부터 계단을 올라가며 건물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는데 건물 하나하나가 주변과 어울리며 경건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병산서원은 류성룡 선생이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데서 시작되었다. 1863년(철종14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고,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의 백미는 만대루(晩對樓)다. 정문인 복례문을 지나서도 다시 만대루 밑을 지나야 경내로 들어갈 수 있다. 서원의 모든 시선이 만대루의 프레임을 통과해서 보이는 강과 산과 나무를 배경으로 깔고 사물을 인식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다.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 ‘백제성루(百帝城樓)’의 싯귀 중에서 “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 만 하니)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만대루에서 내려다보는 노송과 백사장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屛風)을 두르듯이 병산(屛山)이 펼쳐 있다. 만대루에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만대루에 앉아 바라보면 매우 행복할 것 같았다.

만대루의 가로 세로의 비는 다른 한옥의 비율과 달라서 인상적이다. 텔레비전 화면의 비율이 4대 3에서 16대 9로 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벽이 없는 우리나라 누각에서 느낄 수 있는 비어있음(空)의 미(美)는 서양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미감이다. 칸이 비어있는 우리의 사방탁자도 서양 사람들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이다. 주위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모두 끌어들여 즐기는 만대루의 멋은 말 그대로 멋스럽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서울에서 자란 나는 최근까지 배롱나무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요즘 기후 온난화 덕분인지 중부지방에도 배롱나무가 많이 식재되었고 여름이 되면 이름값(백일홍나무→배롱나무)을 하듯이 백 일에는 못 미치지만 오랫동안 붉은 꽃을 보여준다.

몇 해 전 담양에 있는 명옥헌에 핀 400여년 된 배롱나무 꽃 군락이 연못물 속까지 가득 비쳐진 장관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입을 다물지 못한 적이 있다. 그때의 감동 때문에 여름만 되면 명옥헌의 배롱나무 꽃이 떠오른다. 오래 전 심어진 병산서원의 배롱나무도 서원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켜 준다. 앞으로는 여름이 오면 명옥헌의 배롱나무 꽃과 병산서원의 배롱나무 꽃을 같이 기억할 것 같다.

병산서원에서 내려다본 모습.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 서원

원래 일정에는 없었으나 서원 순례가 이번 여행의 주제가 되었으니 가까운 풍기 소수서원을 보고 집으로 가기로 긴급 합의했다. 다른 서원은 몰라도 소수서원은 어릴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은 대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고려 말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 선생의 고향인 이 곳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묘(祀廟)를 세우고,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는 조선 최초의 서원을 1543년 세웠다. 그 뒤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명종 임금에게 서원의 공인을 요청하여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 현판과 함께 서적과 토지, 노비를 하사받음으로써 임금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영광스러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효시가 되었다.

소수서원 (출처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나는 작년에 이곳을 방문하여 문화재 해설사를 통해 자세히 둘러보았기에 소수서원 사료관을 찾았다. 사료관은 최근에 설명 자료가 정비되어 산뜻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우선 ‘한국 도학의 계보’라는 플라스틱 도표가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주류 유학자들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도표로 그려 놓았다.

여기서 도학은 주자학(성리학)의 다른 이름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북송의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이 등 이른바 오군자(五君子)에 의해 창도, 전개되고, 남송의 주희에 의하여 집대성된 학문으로서 송나라의 학문이라고 송학(宋學), 주희가 집대성한 학문이라고 주자학(朱子學), 정이와 주희가 집대성하였다고 정주학(程朱學) 그리고 도학(道學)이라고도 일컬었다.

역사문화 여행을 기록하려니 짧은 지식에 공부할 것이 많아져 다소 늦어졌지만 뜻밖에 뜻 깊은 여행을 주선해서 마련해준 작은 사위와 진영에게 감사하고 여행기를 적어 두 사람에게 선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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