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광주학생운동 발발… 3·1운동 후 최대규모의 항일운동

일제 강점기 때, 전남 지역은 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토지수탈을 위한 일본인 이주민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 일제의 수탈과 멸시를 몸으로 느끼면서 자랐던 한국인 학생들과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는 항상 갈등과 마찰 요인이 잠복해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5시30분쯤, 전남 나주역 개찰구 밖이 소란했다. 광주중학에 다니는 후쿠다 등 일본인 학생들이 박기옥 등 광주여고보 학생 3명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을 불러세워 따졌으나 사과는커녕 오히려 “센징”이라며 놀림을 받았다. 순간 박준채의 주먹이 일본인 학생의 얼굴로 날아들었고, 이내 양국 학생들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마침 주변에 있던 일본인 순사는 사건의 경위도 묻지않은 채 박준채의 따귀를 때리고 욕설을 퍼부으며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두둔했다. 이날은 일단 이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광주 시내 분위기는 몇 명씩 떼를 지어 다녀야 할 정도로 살벌해졌고 누가 칼에 맞았느니 하는 소문들로 한껏 긴장이 고조됐다. 며칠간의 사소한 충돌이 있은 뒤 마침내 11월 3일이 다가왔다. 이날은 일본의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명치절(明治節)로 메이지 천황의 생일이었다. 일요일이었음에도 일제는 각 학교에서 기념식을 치르게 했다. 한국인에게도 이날은 음력 10월 3일로 중요한 명절가운데 하나인 개천절이었다. 따라서 일본인이 축제분위기였다면 한국인은 서글픈 날이었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양국 학생이 충돌하면서 한국 학생들은 억눌렸던 민족감정을 폭발시켰다. 광주고보를 필두로 광주 전역의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로 진출했다. 하루 동안 40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됐으나 이날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 5만4000명이 시위에 참가, 퇴학 582명·무기정학 2330명·검거 1462명을 기록했다. 3·1운동 후 국내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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