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마틴 루터, 교회의 면죄부 판매행위 비난하는 공개 반박문 교회 정문에 붙여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구입하기만 하면 본인은 물론이고 친척까지도 저승의 연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면죄부 판매행위를 비난하는 공개 반박문이었다. 이 때만해도 루터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할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반박문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받으면서 루터는 교회와 선을 긋고 종교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중심에 서게되었다. 인쇄술 덕분에 국제적으로 유명인사가 된 첫 케이스였다.

루터는 자신의 죄를 신문하기 위해 보름스 독일 의회가 열린 1521년 4월 21일, “의견을 철회하겠느냐”는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의 질문에 거부했다. 그러자 황제는 분노했고 일부 광신도들은 그를 “불속에 넣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카를 5세는 루터의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선제후(選帝侯)와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그를 화형시킬 수는 없었다. 며칠 후 복면의 한 무리가 그를 낚아채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도착한 곳은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성이었고 그는 그곳에서 성서 번역에 매달렸다. 그에게 구원은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했고 권위는 ‘오직 성서에만’ 주어질 뿐이었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에 의존하지 않고 성서의 원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어 원전으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옮겼다. 구약성서도 히브리어 원전에서 독일어로 번역했다. 비록 오류도 많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성서(야고보서)는 성서 목록에도 올리지 않았지만 토착어로 번역된 세계최초의 성서였다. 그는 또한 100여 권의 소책자도 저술해 1518∼1520년 사이에 독일에서 인쇄된 인쇄물의 60% 이상이 그의 저술일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렇게 교황의 ‘무오류성’을 지적한 루터였지만 그 자신도 오류가 적지않았다. 1520년대 일어난 농민봉기가 폭동으로 발전하자 무력진압을 주장, 농민봉기를 참혹하게 진압하는데 관여하고, 자신과 종교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였으며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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