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첼로의 신동’에서 ‘거장 지휘자’의 길을 걷는 장한나

↑ 장한나 (출처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by 김지지

 

1994년 열두 살에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 신동(神童)으로 이름 날렸던 장한나(1982~ )가 자신의 악단을 이끌고 서울에 왔다. 지휘자로선 처음이다. 2007년부터 지휘 겸업에 나서서 불과 10년 만에 노르웨이 명문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겸 예술감독이 된 그가 첫 내한인 트론헤임과 함께 2019년 11월 13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부산, 대구, 전북 익산을 돌았다. 트론헤임 심포니는 대니얼 하딩 등 젊고 재능 있는 지휘자들이 거쳐간 110년 역사의 노르웨이 악단이다.

장한나와 그가 지휘하는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출처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5살 때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는 게 참 행복하다”고 말해

장한나(1982~ )의 웃음은 천진하고 해맑다. 상황에 따라 “호호호”, “히히히”, “헤헤헤” 등 각기 다르게 들리는 장한나의 웃음을 접한 사람들은 일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무장해제되고 만다. 이런 웃음은 장한나의 성격이 여유가 있고 낙천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극도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연주자들에게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장한나는 경기 수원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3살부터 피아노를 배우다 5살 때 생일 선물로 받은 첼로에 매료되었다. 어느 날 부모는 어린 한나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에 대해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는 게 참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순간 부모는 한나의 음악적 재능을 확신했다.

장한나는 일취월장했다. 9살 때인 1991년 ‘월간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서울시향을 비롯해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다. 부모는 몸이 달았다. 결국 장한나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칠 무렵인 1993년 1월 장한나의 재능 하나만을 믿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가 유학생 비자 신분으로 도미했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장한나의 학업비와 값비싼 악기 구입 등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장한나의 천재적 재능과 부모의 열성이었다.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도 장한나의 연주 테이프만을 듣고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을 허락했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는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출전하는 장한나에게 8분의 7 사이즈의 첼로를 빌려주었다.

장한나 앨범

 

“한나의 연주를 듣고 나서 환생을 믿게 되었다”

장한나는 1994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3대 첼로 콩쿠르 가운데 하나인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 출전했다. 100명이 넘는 유망주가 대거 출전한 콩쿠르에서 장한나는 10월 15일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연소 대상과 현대음악상을 수상했다. 콩쿠르 주최자인 로스트로포비치는 “한나가 잘못되면 내가 죄를 짓는 것”이라며 장한나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장한나

 

세계적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계의 거장 주세페 시노폴리도 그녀의 천재적인 음악성에 반해 후원을 약속했다. 지휘자 로린 마젤은 “장한나만큼 완벽한 연주를 하는 첼리스트는 내 생애에 처음”이라며 극찬하고 미샤 마이스키는 “한나의 연주를 듣고 나서 환생을 믿게 되었다. 누구도 그 아이를 함부로 가르쳐선 안 된다”며 장한나의 천재성에 경외심을 표했다. 문제는 장한나의 재능을 뒷받침해 줄 값비싼 첼로였다. 장한나 부모는 우리나라 문화체육부 장관 앞으로 “좋은 악기를 구입해서 한나에게 임대해줄 수 없느냐”고 호소 편지를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와 장한나 후원회가 나서 7억 원을 호가하는 1757년산 명기 과다니니를 구입해 1995년 4월 30일 장한나에게 기증했다. 장한나는 그날 이 악기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세계가 알아주는 ‘첼로의 신동’인데도 일반고와 하버드대를 선택

장한나는 커티스 음악원에 첼로 부문 최연소로 합격했다. 하지만 “음악에만 치우치면 보편적인 사고를 갖추기 힘들 것”이라는 부모의 판단에 따라 일반 사립학교로 보내졌다. 이번에도 수업료는 전액 장학생 대우를 받아 면제받았고 장한나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장한나는 연주 여행을 떠날 때는 교과서를 들고 가 틈틈이 공부하고 담임교사의 배려로 이메일 강의를 듣는 것으로 교과 과정을 따라갔다. 이런 노력 덕에 2002년 하버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장한나 앨범

 

장한나는 1995년 11월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고 런던심포니가 연주한 데뷔 앨범을 EMI에서 냈다. 첼리스트로서는 역대 최연소였다. 음반은 장한나에게 ‘에코 음반상’과 ‘올해의 영아티스트상’을 안겨주었다. 이후에도 장한나는 ‘그라모폰 협주곡 부문 올해의 음반상’(2003)을 수상하고 영국의 ‘그라모폰’지가 뽑은 ‘내일의 클래식 슈퍼스타 20인'(2006)으로 선정되는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장한나는 2007년 5월 27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성남 국제청소년 관현악 페스티벌’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세계적 음반사 EMI를 통해 이미 6장의 독집을 발표한 정상급 첼로 연주자인데도 생소한 지휘 무대에 선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첼로는 바이올린과 달리 레퍼토리가 적다. 바흐, 베토벤, 하이든, 드보르자크 등 50여 곡이 주요 레퍼토리의 전부다. 그래서 첼리스트들은 음악적 한계를 넘기 위해 지휘 공부를 한다. 첼리스트 출신인 토스카니니와 로스트로포비치 등이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시 장한나는 지휘를 시작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50년 더 첼로를 한다고 했을 때 알면 알수록 점점 현미경으로 디테일을 보는 일밖에 안 남아요. 시야가 좁아지는 위험이 있죠. 또 음악은 스스로 새로운 열정을 갖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져요.” 그러면서 “첼로 독주가 같은 빨간색을 얼마나 짙고 연하게 채색할지 고민하는 일이라면, 오케스트라는 모든 색이 어울리는 무지개를 빚어내는 것”이라며 지휘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장한나 (출처 크레디아)

 

세계적인 여성 지휘자로 이름을 떨칠 장한나의 미래가 궁금

거장 지휘자 가운데 여성이 없는 음악계 현실에서 장한나가 지휘자로 세계에 알려진 것은 2012년 12월이었다. 카타르 국립교향악단인 ‘카타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장한나를 음악감독으로 영입한 것이다. 카타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카타르의 왕비가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육성한다는 생각을 갖고 2007년 거금을 투자해 창단한 악단이다. 단원은 인종과 국적을 망라했고 평균 연봉은 신설 오케스트라치고는 파격적으로 뉴욕 필하모닉 수준에 맞췄다. 카타르라는 꼬리표만 뗀다면 세계 여느 교향악단 못지않은 다국적 오케스트라인 셈이다.

장한나가 음악감독을 맡게 된 과정도 전격적이었다. 2012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이 악단을 처음 지휘했을 때 단원 투표를 거쳐 악단이 음악 감독직을 공식 제안한 것이다. 장한나는 2013년 9월, 2년 임기의 음악감독으로 정식 취임했다. 하지만 2년의 임기를 채우지 않고 취임 1년 만에 물러났다. 경영진과의 계속되는 행정적 불화와 타협하기 어려운 예술적 견해 차이가 원인이었다. 이후 장한나는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의 수석 객원지휘를 거쳐 2017년 트론헤임의 수장(首長) 자리인 상임지휘자를 꿰찼다. 2022년 5월에는 독일 함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까지 맡았다. 음악 감독이나 상임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담임’이라면, 수석 객원지휘자는 ‘부(副)담임’과도 같은 역할이다.

장한나의 내연 공연을 안내하는 포스터 (출처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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