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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권력’에 맞섰던 검찰들 3-③] 이승만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임영신 장관 기소한 최대교 검사 이야기

↑ 왼쪽부터 최대교 서울지검장, 임영신 상공장관, 이승만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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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70년 전 최대교 서울지검장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1949년 이승만 대통령과 이인 법무장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임영신 상공장관을 기소한 강직함 때문이다. 이후 오랫동안 최 지검장은 대통령의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고 검사의 본분을 올곧게 지킨 인물로 언론에 소개되어 왔다. 독재정권의 부정과 비리를 질타하는 ‘대쪽 검사’의 상징으로 더없이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 지검장은 강직함에 검소함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언론이 그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실은 미화·과장하거나 일부 사실은 알게 모르게 빠뜨렸다는 것이다. 더구나 최 지검장은 재판에서 임 장관의 유죄를 입증하는데도 실패했다. 그런데도 언론이 이런 사실들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과거든 지금이든 정파적 입장에만 급급해 최 지검장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다. 물론 최대교 검사장은 임영신 장관의 유죄를 입증하지는 못했어도 ‘살아있는 권력’을 과감히 기소한 것만으로도 한국 검찰사에 우뚝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후배 검사들이 귀감으로 삼고 있는 최대교 검사가 누군지를 알아본다.

 

‘임영신 독직 사건’의 시작은 감찰위원회의 파면 결의와 검찰 고발

1949년 4월 초 정부 산하 감찰위원회가 당대의 정치적 거물이자 상공부 장관인 임영신의 파면을 결의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귀속재산 및 사업체의 공금을 횡령하고, 뇌물을 수수하고, 민간 기업체에서 모금한 돈을 선거자금으로 유용했다는 혐의였다. 감찰위는 국회의장 신익회에게도 이 사실을 전달했다. 이른바 ‘임영신 독직 사건’이다. 당시 감찰위원회는 공무원의 부정사실이 드러나면 징계 감봉은 물론 파면 결의까지 할 수 있었는데 감찰위원장은 대쪽처럼 곧고 깐깐하기로 이름난 국학자 정인보였다. 감찰위원회는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엄정한 관기(官紀)를 책임지는 기관으로 현재의 감사원에 해당한다.

사건을 총괄 지휘한 당시 서울지검장은 최대교 검사(1901~1992)였다. 그는 1948년 11월 서울지검장에 부임해 1949년 9월 사직할 때까지 10개월간 현대사에 파란을 몰고 왔던 각종 사건들의 한 복판에 있었다. 서울지검장 재임 중 유명 사건은 반민특위 간부 및 정부요인 암살음모사건(일명 노덕술 사건), 국회프락치 사건, 법조프락치 사건,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등이다. 그중 특히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오늘날까지 후배 검사들이 그를 귀감으로 삼게 한 것은 ‘임영신 독직 사건’이다.

감찰위원회의 임영신 고발에 따라 서울지검이 수사에 착수한 결과 임영신 상공장관이 1948년 12월 경북 안동 국회의원 보궐선거 기간 때 대구의 모 메리야스공장 관리인 이모씨로부터 270만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임영신은 “선거사무장이자 여동생인 임영선이 나도 모르게 돈을 받아 선거비용으로 썼다”면서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항변했다. 최대교는 증거 인멸을 우려해 1949년 4월 4일 동생 임영선을 구속했다.

그러자 언니 임영신이 반발했다. 4월 8일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4월 10일 직접 중앙방송국 방송망을 통해 사건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해명방송을 했다. 심지어는 여동생의 3살된 어린애를 안고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우는 어린애를 달래며 “어린애가 다 죽게 됐습니다. 애엄마를 구속하는 것은 인도에서 벗어난 일입니다”라며 동생의 석방을 하소연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8일 “사실 여부가 확인되기 전이므로 위원회 파면결의는 월권이고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파면을 보류하겠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임영신은 일제강점기 때 교육운동과 여성운동을 벌인 여장부… 이승만과는 돈독한 관계

임영신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비호한 것일까. 임영신(1889~1977)은 일제강점기 때 교육운동과 여성운동을 벌인 여장부였다. 전북 진산(현재는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전주기전여고 재학시절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30년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하고 1931년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임영신은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이나 사모심으로 이승만의 이름 가운데 ‘승(承)’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승당(承堂)’으로 지을 정도로 미국 체류 당시부터 이승만과의 관계가 돈독했다. 이승만에게서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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