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왼쪽부터 최대교 서울지검장, 임영신 상공장관, 이승만 대통령
by 金知知
70년 전 최대교 서울지검장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1949년 이승만 대통령과 이인 법무장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임영신 상공장관을 기소한 강직함 때문이다. 이후 오랫동안 최 지검장은 대통령의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고 검사의 본분을 올곧게 지킨 인물로 언론에 소개되어 왔다. 독재정권의 부정과 비리를 질타하는 ‘대쪽 검사’의 상징으로 더없이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 지검장은 강직함에 검소함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최근에는 조국 법무장관의 가족 수사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몰아세우면서 다시 최대교의 이름이 역사 법정에 불려나오고 있다. 70년 전 최대교 지검장처럼 윤석열 검찰총장도 현직 장관을 과감하고 소신껏 수사하라는 바람에서다.
문제는 언론이 그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실은 미화·과장하거나 일부 사실은 알게 모르게 빠뜨렸다는 것이다. 더구나 최 지검장은 재판에서 임 장관의 유죄를 입증하는데도 실패했다. 그런데도 언론이 이런 사실들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과거든 지금이든 정파적 입장에만 급급해 최 지검장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다. 물론 최대교 검사장은 임영신 장관의 유죄를 입증하지는 못했어도 ‘살아있는 권력’을 과감히 기소한 것만으로도 한국 검찰사에 우뚝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후배 검사들이 귀감으로 삼고 있는 최대교 검사가 누군지를 알아본다.

‘임영신 독직 사건’의 시작은 감찰위원회의 파면 결의와 검찰 고발
1949년 4월 초 정부 산하 감찰위원회가 당대의 정치적 거물이자 상공부 장관인 임영신의 파면을 결의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귀속재산 및 사업체의 공금을 횡령하고, 뇌물을 수수하고, 민간 기업체에서 모금한 돈을 선거자금으로 유용했다는 혐의였다. 감찰위는 국회의장 신익회에게도 이 사실을 전달했다. 이른바 ‘임영신 독직 사건’이다. 당시 감찰위원회는 공무원의 부정사실이 드러나면 징계 감봉은 물론 파면 결의까지 할 수 있었는데 감찰위원장은 대쪽처럼 곧고 깐깐하기로 이름난 국학자 정인보였다. 감찰위원회는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엄정한 관기(官紀)를 책임지는 기관으로 현재의 감사원에 해당한다.
사건을 총괄 지휘한 당시 서울지검장은 최대교 검사(1901~1992)였다. 그는 1948년 11월 서울지검장에 부임해 1949년 9월 사직할 때까지 10개월간 현대사에 파란을 몰고 왔던 각종 사건들의 한 복판에 있었다. 서울지검장 재임 중 유명 사건은 반민특위 간부 및 정부요인 암살음모사건(일명 노덕술 사건), 국회프락치 사건, 법조프락치 사건,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등이다. 그중 특히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오늘날까지 후배 검사들이 그를 귀감으로 삼게 한 것은 ‘임영신 독직 사건’이다.

감찰위원회의 임영신 고발에 따라 서울지검이 수사에 착수한 결과 임영신 상공장관이 1948년 12월 경북 안동 국회의원 보궐선거 기간 때 대구의 모 메리야스공장 관리인 이모씨로부터 270만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임영신은 “선거사무장이자 여동생인 임영선이 나도 모르게 돈을 받아 선거비용으로 썼다”면서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항변했다. 최대교는 증거 인멸을 우려해 1949년 4월 4일 동생 임영선을 구속했다.
그러자 언니 임영신이 반발했다. 4월 8일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4월 10일 직접 중앙방송국 방송망을 통해 사건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해명방송을 했다. 심지어는 여동생의 3살된 어린애를 안고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우는 어린애를 달래며 “어린애가 다 죽게 됐습니다. 애엄마를 구속하는 것은 인도에서 벗어난 일입니다”라며 동생의 석방을 하소연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8일 “사실 여부가 확인되기 전이므로 위원회 파면결의는 월권이고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파면을 보류하겠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임영신은 일제강점기 때 교육운동과 여성운동을 벌인 여장부… 이승만과는 돈독한 관계
임영신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비호한 것일까. 임영신(1889~1977)은 일제강점기 때 교육운동과 여성운동을 벌인 여장부였다. 전북 진산(현재는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전주기전여고 재학시절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30년 캘리포니아대를 졸업하고 1931년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임영신은 이승만에 대한 존경심이나 사모심으로 이승만의 이름 가운데 ‘승(承)’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승당(承堂)’으로 지을 정도로 미국 체류 당시부터 이승만과의 관계가 돈독했다. 이승만에게서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임영신은 1934년 귀국 후 1935년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해 교장으로 활동했다. 1938년 흑석동에 중앙보육학교 신축교사를 지음으로써 오늘날 중앙대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중앙보육학교는 이후 중앙여자전문학교(1945년), 중앙여자대학(1946년), 중앙대학(1948년)으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활동의 최전선을 지켰다. 194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전파하는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 8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상공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임영신은 이처럼 이승만의 정치적 추종 세력을 대표하는 거물급 여류인사였다. 정치적 야심이 커 경북 안동 을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도 출마해 1949년 1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독직 사건은 이 선거 과정에서 발생했다.

최대교 서울지검장,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반대에도 임영신 기소
최대교는 4월 26일 임영신을 10시간동안 심문한 뒤 기소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자 이인 법무장관이 기소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표면상 이유는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장관이 부정을 범했다고 하면 우리 정부를 불신해 원조를 끊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최 검사장이 기소의 뜻을 굽히자 않자, 권승렬 검찰총장이 5월 23일 “임 장관을 면직하도록 건의해 볼 것이니 5월 27일까지 기다려 보라”고 제의했다. 최 검사장은 제의를 받아들였다. 장관 등 고위관리가 사임을 하면 기소유예를 하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타결책으로 이전부터 존재하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5월 27일이 되자, 이인 장관이 “장관, 도시자, 판사, 검사 등을 기소할 때에는 법무부장관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통첩과 함께 “이 사건을 기소유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최 검사장은 “기소·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고유권한이라고 형사소송법에 규정되어 있으므로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 사건의 기소·불기소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하니 재고하여 달라”는 회신을 검찰총장을 통해 이인 장관에게 전달했다.

같은날 이 장관이 이 대통령에게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정치적인 해결방안을 강구하라”는 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당일 임영신을 만나 정치적 해결을 권고했으나 임영신은 완강히 거절했다. 결국 5월 27일이 되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최대교는 5월 28일 임영신을 기소했다. 공소사실은 11가지였다. 최대교가 장관을 전격 기소한 유탄은 이인 장관이 맞았다. 5월 31일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2대 법무장관에는 검찰총장 권승렬이 승진 발탁되었다.
비록 이인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보이긴 했으나 생애 전반을 살펴보면 이인 역시 대단한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항일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조선변호사협회장(1931년), 조선물산장려회장(1935년)을 역임하고 김병로·허헌과 함께 ‘3대 민족인권변호사’로 칭송을 받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변호사 자격정지를 당하고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선고를 받았다. 해방 후에는 초대 법무장관으로 임명되고 1949년 2월 종로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과 거리가 있었던 김병로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도 항일 변론의 동지였던 이인 장관의 강력한 천거 때문이었다. 이인은 김병로를 ‘김규식의 사람’이라고 경원하는 이승만에게 “김병로를 대법원장으로 하지 않으면 나도 그만두겠다”고 맞서 관철시켰다.
임영신 자매 무죄선고 받고 최대교는 해임
서울지검은 임영신에게 뇌물을 제공하거나 업무상 횡령·배임을 했다는 혐의로 상공부 비서실장을 비롯해 상공부, 경상북도청, 귀속재산기업체의 임직원 등을 줄줄이 구속했다. 2개월 여의 수사 끝에 임 장관을 포함해 18명(구속 10명, 불구속 8명)을 기소했다. 국회는 감찰위원회의 통보를 받고 자체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조사에 나선 결과를 ‘임영신 상공장관사건 조사보고서’ 제목으로 6월 3일 국회 본회의에 제출했다. 그런데 보고서 내용은 감찰위원회와 검찰의 조사 사실과 상반되었다. 국회는 ‘감찰위원회의 통고 사실만으로는 법적으로 파면결의를 할 근거가 없다. 다만 행정상의 책임을 추궁한다면 별 문제’라고 결론을 내리고 활동을 끝냈다. 버티던 임영신도 6월 6일 경질되고 감찰위원장 정인보도 7월에 물러났다.
검찰이 임영신을 기소하자 김병로 대법원장이 특별재판부를 구성했다. 6월 28일 첫 공판이 열리고 10여 차례의 공판을 거친 끝에 8월 19일 검사의 구형이 발표되었다. 임영신에게는 징역 3년에 벌금 30만원, 동생 임영선에게는 징역 1년에 벌금 5만원을 구형되었다. 최대교는 8월 20일 상부로부터 사표를 내라는 종용을 받아 8월 26일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당장 수리되지는 않았다.
9월 17일 선고공판에서는 임영신과 임영선 등 9명은 무죄, 비서실장 등 9명은 유죄가 선고되었다. 유죄도 1명만 실형을 선고받고 나머지는 전원 집행유예였다. 재판부는 임영신 장관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유로 대부분의 혐의가 범죄 구성이 안되고 일부는 무죄이거나 임영신이 알지 못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 결과에 대해 비판이 없을 리 없다. 피의자들이 임 장관을 구명하기 위해 법정에서 과거 검찰에서 한 진술을 번복하고 법원이 임영신에게 불리한 증거와 진술은 특별한 이유 없이 모두 배척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외압에 의해 법원이 정치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물론 검찰 측 주장이다. 최대교의 사표는 1심 선고가 있은지 6일이 지난 9월 23일 수리되었다. 간부급 검사 10여명도 그 시기 집단적으로 사표를 제출했는데 대부분 권고사직이었다.
재판에선 유죄 입증하지 못했으나 후배 검사들은 ‘강직한 검사’ ‘대쪽 검사’의 귀감으로 인정
1950년 1월 6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에서도 임영신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과 실형을 받은 피고인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상고심 판결은 전쟁이 막바지이던 1951년 9월 18일에 선고되었다. 판결을 선고한 대법원 형사부는 김병로(재판장), 김찬영, 백한성, 김두일, 한환진 판사였다. 대법원은 임영신 등에 대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고 일부 피고만 유죄를 확정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도 비판 의견이 없진 않으나 대법원 판결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청렴강직의 표상이자 법조인과 공직자의 영원한 귀감으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를 받고 있는 김병로 대법원장이 재판에 직접 관여했기 때문이다. 결국 법원 판결은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처음부터 무리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셈이 되었다.

최대교는 임영신의 유죄 입증에서는 실패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사건을 강직하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아 후배 검사들 사이에서는 ‘강직한 검사’ ‘대쪽 검사’의 귀감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검찰의 양심’으로 불리고 있다. 1999년 발족한 ‘한국법조3聖기념사업회’에서는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린 김홍섭과 함께 최대교를 법조 삼성(三聖)으로 지명하고 전북 전주시 덕진공원에 ‘한국법조3성’ 동상을 건립했다. 이들 ‘삼성’은 모두 호남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최대교, 일제 강점기 검사 시절 민족의식 같은 것은 없어
이제 최대교가 어떤 인물인지를 살펴본다. 최대교는 1901년 전북 익산시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늦은 나이인 15세에 초등학교에 입학, 근대교육을 받고 18세에 서울로 유학을 떠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 전신)에 입학했다. 1923년 2월 졸업 후에는 그해 4월 일본의 호세이(법정)대학 예과와 1926년 4월 호세이대학 법률과에 진학하고 1929년 3월 동 대학을 졸업했다.

1932년 11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조선총독부 사법관 시보(1933년)와 평양지방법원 검사대리(1934년)를 거쳐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일제 시절 마지막 지위는 1944년 11월 발령받은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청 검사분국 상석검사였다. 검사 시절 그는 법질서를 중시했으나 강렬한 민족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검사 직책을 수행한 사실도 친일의 문제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1945년 5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것이므로 조선독립을 꾀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을 기소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기의 사법 시스템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들면 이런 식이다. “검사 시절은 대한민국 시대보다 일제시대가 오히려 일하기가 쉬웠다. 법대로만 처리하면 상부에서 검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지시를 거의 하지 않아 소신껏 일을 할 수 있었다” “부산지검 시절, 일본인 경남지사의 독직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인에게 사건을 맡기면 너무 관대하게 처리될까봐 한국인 검사인 나에게 맡겼다” “일제 때는 법대로만 하면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차별을 하지 않았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 사법제도에 대해서도 신뢰를 보냈다. 1919년 3·1운동 관련자에 대한 일제의 판결을 분석한 뒤 “일제 검찰은 내란죄를 적용하자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그보다 가벼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을 적용했기 때문에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한국인들 가운데 최고형이 3년에 그쳤다”고 했다. 최대교의 이런 언급에 대해 일부 학자나 법조인들은 “최대교가 꼭 친일이어서 그런게 아니라”고 해명한다. 즉 해방 뒤 법정에서 몸소 겪은 외부의 압력, 상부의 변칙적 일처리 등을 직접 경험하고 개탄하는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 사법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생 대한민국의 행정부는 입법부와 사법의 독립성을 부정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면 가차없이 현직에서 축출되거나 지위강등의 수난을 겪어야 했다. 따라서 최대교는 낙후된 환경이 하루 빨리 개선되기를 희망하고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이려 애쓰는 과정에서 이런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
해방 공간에서는 좌익 척결에 앞장 서
최대교는 해방 후 미군정청에 의해 1945년 11월 전주지방법원 검사국의 검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방검찰청이 조직된 것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였다. 1948년 11월 서울지검장에 임명되어 ‘임영신 독직사건’을 처리했다. 해방 후 최대교는 좌우 갈등에서 좌익을 철결하는데 앞장선 충직한 검사였다.

이런 그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 있었다. 1948년 8월 전라북도 경찰국이 남로당 전주시당 법원 세포책인 전주지방법원 서기 등을 체포해 최대교가 검사장으로 있는 전주지검에 송치했다. 전주지검은 그들을 기소했으나 법원이 일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법원에 대한 최대교 검사장의 불만이 폭발했다. 그는 당시 전주지방법원장이 경력상 섣불리 좌익으로 취급할 인사가 아닌데도 좌익 혐의로 딘 군정장관에게 고발했다.
물론 당시는 5·10총선 반대운동, 제주 4·3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극심한 좌우대립 국면이었고 검사는 좌익세력 척결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판사가 좌익 사건을 무죄 또는 경한 형벌을 내리면 판사를 좌익으로 몰아 고발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검사도 경찰 등에서 송치한 것을 풀어주면 검사마저도 좌익으로 몰던 시절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뤄진 고발이었으나 그의 고발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저항을 초래했다. 대법원장은 “민주사법 건설 정신에 위배된다”는 내용의 담화문까지 발표했다. 법조계는 물론 언론도 비판적이었다. 판결에 불만이 있으면 상급법원에 상소하여 시비를 가리면 될 일을 고발까지 한 것은 지나치다는 비판이었다. 더구나 지검장이 지법원장을 고발했다는 것은 재판에 대한 검사의 간섭으로 비쳐질 수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4·19후 다시 검찰로 돌아가
최대교는 1952년 11월 감찰위원에 임명되었다. 당시 이광 감찰위원장이 최대교를 추천했으나 법무장관 서상환(임영신 사건 당시 서울고검장)이 반정부주의자를 감찰위원으로 앉힐 수 없다고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광 감찰위원장과 이승만 대통령의 친분이 두텁고 일본 유학시 가까웠던 국무총리서리 겸 재무장관 백두진의 비호 덕에 임명될 수 있었다.
1954년 2월 감찰위원회가 해체되면서 감찰위원을 끝으로 재야법조인으로 물러나 있던 최대교가 다시 검찰로 돌아온 것은 1960년 4·19 후였다. 최대교는 5월 17일 서울고등검찰청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5·16 후, 군사정권이 그에게 맡기려 한 혁명검찰부장은 거절했지만 1962년 2월 신설된 대검찰청 감찰부의 초대 부장은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1963년 말 민정이양과 함께 검찰을 떠났다. 이후 1992년 10월 21일 숨질 때가지 30년 가까이 변호사 생활을 계속했다.
강직한 사람, 검소한 사람
최대교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가 일제강점기 때 부산지검 검사 시절 사표를 던져 총독부의 압력을 물리친 일화는 유명하다. 그때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 절도 피의자를 때려 숨지게 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총독부 경무국은 법무국을 통해 담당검사인 그에게 기소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해 왔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일본인 순사에 대한 기소장과 자신의 사표를 동시에 검사정(檢事正·지금의 검사장)에게 올리고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그 순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경찰서에 가서 일본인 순사를 조사하기에 앞서 입회서기에게 미리 빵 2개를 사두도록 했다. 경찰서장이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그를 초대했지만 그는 빵 2개로 요기를 하며 조사를 마쳤다. 이같이 깨끗한 그의 몸가짐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원동력이었다.

4·19후 서울고검장 시절에는 대학생들이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에 관용차가 너무 많다고 시위를 벌였을 때는 서울고검에 수사용 지프차 한 대만 남겨두고 일체의 관용차를 없애버리도록 했다. 자신은 다음날부터 아현동 집에서 서소문 검찰청까지 걸어 다녔다. 1962년 군사정부가 그를 형사소송법 고등고시위원으로 내정했을 때는 맏아들이 이미 사법고시 응시원서를 낸 상태라면서 과감히 물리쳤다. 변호사 시절 모든 소송 대리행위는 법정에서 서류를 통해서만 할 뿐 판사실에는 찾아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최대교의 아호 ‘화강((華岡)’은 ‘강화(江華)에 본관을 둔 강직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정인보가 지어준 것이다. 정인보는 그의 강직한 기개를 두고 ‘가을 강은 맑지만 부드러워, 배를 띄우지 못하는 얼음 강과 다르다(秋水之淸淸而柔 不如氷江不可舟)’라고 시를 지어 읊은 바도 있다. 또 형법학자인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은 법대생들에게 최대교를 ‘가장 본받을 만한 청백리 법조인’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최대교는 오랫동안 검사의 직책에 있고 부친이 천석꾼이었는데도 늘 가난했다. 그래도 한눈 팔지않고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중년에 마련한 대지 58평에 건평이 28평인 낡은 아현동 자택에서 40년 넘게 살았다. 서울지검장 때 월급이 쌀 1가마 정도를 살 수 있는 1만7000원 정도여서 아내는 편지봉투를 만들어 생계에 보탰다. 아들의 학교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한 때도 있었다. 셋째 동생이 암탉 한 마리를 갖고 올라왔을 때는 반가워하면서도 “남이 볼 때는 네가 내 동생인 것을 모르고 뇌물을 갖고 오는 줄 알테니 앞으로는 빈손으로 오라”고 나무랐다.

몇몇 사례는 미화하고 과장
돈이 없어 점심 때가 되면 밥 대신 누룽지를 먹는다고 해서 ‘누룽지 검사장’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점심 식사와 관계없이 집에서 갖고 온 누룽지를 사무실에서 먹고 있는데 출입기자가 그것을 보고는 돈이 궁해 식사 대신 누룽지를 먹는다며 ‘누룽지 검사’라고 별명을 붙인 것이다.
최대교가 서울고검장 자리를 한동안 지키다가 1963년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나와 대통령이 되자 ‘미련없이 검찰을 떠났다’고 소개함으로써 마치 최대교가 5·16에 반대하는 심정으로 사표를 쓴 것처럼 쓴 글도 있으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당시 법무부장관 민복기가 불러서 “30대의 신직수가 검찰총장이 되었는데 60세가 넘은 사람이 고검장으로 있는 것은 좀 뭣하지 않느냐”고 해서 그만둔 것이다. 사실 그는 5·16 후에도 대검찰청 감찰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각종 기사와 글에는 검찰이 검사의 표상으로 삼고자 ‘최대교 검사상’을 제정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2005년 검찰이 검토한 적은 있지만 친일 논란 때문에 현재는 유야무야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