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한국보이스카우트 전신 ‘조선소년군’ 발대

20세기 초엽, 선각자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할 목적으로 소년운동에 눈을 돌렸으나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면서 추진이 지지부진했다. 그 무렵 소년운동을 세계 보이스카우트 운동과 연계하려는 일군의 움직임이 있었다. 중앙고보 체육교사 조철호와 YMCA 소년부 간사 정성채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의 감시로 때를 기다려야 했다.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21년 일제가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도입하면서였다. 일제가 이 운동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 두 사람은 조직을 서둘렀다.

결실이 맺어진 것은 1922년 10월 5일 오후4시30분이었다. 이날 보이스카우트 단복을 차려입은 조철호 대장과 8명의 대원들이 중앙고보 뒷산 솔밭에서 ‘조선소년군’ 경성 제1호대 발대식을 가짐으로써 역사적인 한국 최초의 보이스카우트가 창단됐다. 중앙고보 설립자 김성수와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그리고 정성채 등이 참석해 이들의 첫 출발을 축하해주었다. 같은해 정성채도 17명의 소년으로 구성된 ‘소년척후단’을 창립,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조선소년군’의 정식 명칭은 ‘조선 보이스카우트’였으나 언론과 사람들이 ‘조선소년군’으로 부르기를 좋아해 그렇게 불렸다.

각기 따로 활동하던 조선소년군과 소년척후단은 1924년 3월 1일, 이상재를 총재로 추대하고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으로 통합됐으나 운동이념을 둘러싼 마찰로 통합 2개월 만에 다시 결별했다. 이때부터 ‘조선소년군’으로 정식명칭이 바뀌었다. 조선소년군이 점차 확대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일제가 소년군을 해산시킬 트집을 찾던 중 일이 터졌다. 1937년 7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된 시국강연회 식장 안내와 장내 정리를 하고 있던 소년군 단원들의 항건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단원들이 착용한 항건에 그려져 있는 태극마크와 무궁화 등을 발견한 일본 경찰은 즉시 항건을 압수하고 소년군 책임자를 구속했다. 결국 조선소년군은 그 해 9월 3일 총독부의 해산 통보를 받고 강제 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15년 간 활동해 온 조선의 보이스카우트 운동은 광복 때까지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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