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군사력은 장개석의 국민당에 절대적 열세였으나 국민당이 부패하고 대중의 민심을 얻은 게 모택동의 결정적 승인(勝因)이었다

↑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북경의 천안문 성루 누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by 金知知

 

중국이 건국 70주년 기념일인 10월 1일 역대 최대 규모의 열병식을 진행한다. 건국절 열병식엔 군인 1만5000여명과 전투기 160대, 최신 무기 580개가 등장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직접 사열한다. 70년 전 어떤 과정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는지 당시 상황을 살펴본다.

 

일본의 항복 후, 무주공산의 동북 3성을 둘러싸고 막판 혈전 벌여

일본이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기 6일 전인 1945년 8월 9일, 미국의 참전 요청에 따라 150만 명의 소련군이 탱크 5,000여 대를 앞세우고 물밀 듯이 중국 국경을 돌파했다. 뒤이어 중국의 동북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8월 18일 소련에 항복을 선언하고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128만 명의 일본 관동군은 손에서 총을 내려놓아야 했고 중국의 동북 3성은 15년 만에 해방되었다. 그러자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게 된 동북 지역을 둘러싸고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정부가 막판 혈전에 돌입했다.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그린 중국 그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기 전, 선수를 친 것은 공산군이었다. 공산당 중앙은 당 간부와 신사군·팔로군을 대거 산동성에 집결시켜 그곳에서 목선을 이용해 발해만을 건너도록 했다. 공산군은 동북 지역의 광대한 농촌과 중소도시는 물론 교통선을 하나둘 장악했다. 이에 질세라 수십만 명의 국민당군도 미군이 지원한 군함과 수송기를 동원해 동북 지역으로 집결했다.

이처럼 양측 군대의 대거 이동으로 내전 발발의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국민당의 장개석이 평화 제스처를 취했다. 자신의 점령지인 중경에서 건국 방안을 협의하자고 모택동에게 제안한 것이다. 모택동은 회담을 거부했다가는 자칫 평화를 거부하고 인민의 단결을 깨는 내전 세력으로 비난을 받을까봐 마지못해 회담에 응했다. 모택동이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주중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와 함께 적지인 중경으로 날아간 것은 8월 28일이었다. 이후 모택동은 43일 동안 장개석과 국·공 평화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43일간 국공 평화 협상을 벌인 세 주역. 왼쪽부터 주중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 장개석, 모택동

 

공산군, 대도시 벗어나 농촌과 중소도시 거점 전략 더욱 강화해

회담 결과는 10월 10일 체결된 ‘쌍십 협정’에서 드러났다. 남부의 8개 해방구에서 홍군 철수, 홍군을 10분의 1 규모인 20개 사단으로 축소, 공산당과 중도 세력이 참가하는 정치협상회의 개최 등이 골자였다.

쌍십협정문(雙十協定文)

 

그러나 회담이 끝나자마자 국민당군은 중국 본토에서 만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육상교통로의 관문인 산해관(11월)과 장춘·심양·하얼빈 등 대도시(12월)를 점령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산군은 대도시를 벗어나 농촌과 중소도시를 거점으로 삼는 전략을 더욱 강화했다.

국민당군이 이처럼 내전에 준하는 공격을 멈추지 않자 학생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쌍십 협정 준수와 내전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러자 미국의 특사로 파견된 조지 마셜 전 육군참모총장이 조정에 나서 1946년 1월 10일 국공 양당의 정전협정을 성사시켰다. 쌍방은 곧 휴전에 들어갔고 양측의 모든 군대는 이동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양측의 이해가 부딪치면서 무력 충돌이 불가피한 데다 소련군이 1946년 5월 대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철수를 완료하면서 동북 지역은 내전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1946년 6월 26일 국민당군이 정치협상 결의와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2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동북 지역을 비롯해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의 거점인 해방구와 홍군을 공격하면서 마침내 중국의 운명을 가르는 국공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 발발 당시 국민당군 무기는 미국의 지원 받아 압도적으로 우세

내전 발발 당시 국민당군의 병력은 430만 명이나 되고 무기는 미국의 지원 덕분에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점령 지역의 인구는 3억 명 이상이었다. 공산당 병력은 팔로군과 신사군을 합친 128만 명에 19개성의 해방구 민병 200만 명이 전부여서 국민당군에 비해 현격히 약세였다. 공산당에 소속된 인구도 1억 3000만 명에 불과했다. 내전 발발 후 국민당군은 열하성(1946.8)을 장악하고 중국 공산당의 심장부이자 상징인 연안(1947.3)을 점령함으로써 바야흐로 국민당 정부의 승리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문제는 내전으로 인해 급등한 인플레 때문에 국민당 지배 지역의 민중이 기아 상태에 빠지고 경제가 파탄으로 치달았다는 데 있었다. 통화가치는 수직으로 하락하고 국민당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공산당이 주도한 도시 노동자와 학생·지식인의 항의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반면 공산당의 해방구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뤄져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지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는 일도 사라졌다. 악질 지주와 일본에 부역한 사람 등도 1만 5000여 명이나 처단되었다.

전술적으로도 공산군은 임표, 주은래, 팽덕회 등 군사 능력이 탁월한 지휘관들이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서로 협력하며 달려간 반면 국민당군은 파벌로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고위 장교들은 전투보다 착복에만 신경을 썼고 중앙군과 지방군 간 파벌 대립, 중앙군 내에서도 직계와 방계 간의 대립이 극심해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했다.

미군이 국민당에 제공한 최신 무기도 국민당의 부정과 부패로 공산당 수중에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소련군도 동북에서 철군하면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그대로 공산군에 넘겨주었다. 결국 국민당의 초기 승리는 서서히 비관적으로 바뀌고 민심은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다.

 

내전 이래 가장 큰 대전인 ‘회해 전투’에서 국민당군 거의 궤멸

자신감을 얻은 공산당은 1947년 7월 전략적 방어 단계에서 전략적 공세 단계로 전환했다. 1948년 들어서는 동북 지역의 대도시 장춘·길림·심양 등을 포위하고 빼앗겼던 연안을 탈환한 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결정적인 전투는 1948년 가을부터 전개되었다. 1948년 9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52일간 계속된 ‘요녕·심양 전투’에서 중공군은 47만 명의 국민당군을 섬멸하고 동북 지방의 절대 다수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11월 2일의 심양 입성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의 전주곡이었다.

요녕·심양 전투 중 요녕성 서남부 도시 금주(錦州)에서 인민해방군이 성벽을 공격하고 있다.

 

중국 중부의 철도 요충지 회해(淮海)에서 1948년 11월 6일부터 1949년 1월 10일까지 벌어진 ‘회해 전투’는 내전 이래 가장 큰 대전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 전투 중 하나였다. 50만의 공산군과 50만의 국민당 정부 정규군이 65일 동안 혈전을 벌인 회해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이로써 양자강 중하류 이북의 드넓은 지역도 공산당 수중에 떨어졌다.

패색이 짙어지자 장개석은 1949년 1월 자신의 남경정부 권력을 그대로 두는 것을 전제로 한 평화를 제의했다. 하지만 승기를 잡은 모택동은 장개석을 포함한 전쟁 범죄자 처벌, 군대 재편성, 토지개혁 등 장개석이 지킬 수 없는 8개항의 조건으로 응수해 사실상 평화 제의를 뿌리쳤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늘 여기에 수립되었다”

모택동이 중국의 상징인 북경에 평화적으로 입성한 것은 1949년 3월이었다. 홍비(紅匪)로 몰려 22년 동안 중국 전역을 떠돌며 2만 5000리 장정 등 생사를 넘나든 투쟁 끝에 이뤄낸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공산당은 1949년 4월 최후의 공격을 시작해 4월 20일 양자강을 건너 4월 2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에 진입했다. 이어 항주·상해·서안(5월) 등을 함락하고 신강·내몽고(6~7월) 등 서북 전체도 장악했다. 8월에는 호남·호북·복건성, 10월에는 광동성 등 화남 지역, 11월에는 사천·귀주성 등도 함락했다. 더 이상 오갈 데가 없어진 장개석은 중경과 성도를 거쳐 1949년 12월 10일 대만으로 달아났다.

중국 공산당군이 북경에 입성하자 시민들이 환영하고 있다.(1949년 1월 31일)

 

내전이 진행 중이긴 했으나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던 1949년 9월 21일 공산당 대표들이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열어 10일 동안 국기·국가를 제정하고 신정부 조직을 구성했다. 9월 29일에는 ‘인민민주주의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정치적 토대라는 점에 만장일치로 합의한다’는 공동강령을 통과시켰다. 10월 1일에는 모택동 주석, 유소기 부주석, 주덕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은래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구성된 새 정부가 천안문 광장에서 건국 선포식을 열었다.

모택동이 천안문 성루 누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0월 1일 오후 3시였다. 천안문에는 모택동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고 군중으로 가득한 광장 곳곳에는 깃발이 펄럭였다. 이윽고 모택동이 30만 명의 군중을 향해 외쳤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늘 여기에 수립되었다.” 곧 장엄한 선율의 의용군행진곡이 연주되고 28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오성홍기가 게양되었다. 예포 28발은 공산당이 걸어온 28년의 간난의 세월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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