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③-4] 일제 하에서 공산 혁명을 꿈 꾼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과 배신, 투쟁과 고난 이야기 :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고명자를 중심으로 / 6-④

↑ 1938년 10월 10일 무한의 한구에서 가진 조선의용대 발대식 모습. 중국 본토에서 창건된 최초의 독립군 부대다. 의용대 깃발 바로 뒤 가운데 인물이 김원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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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조선의용대,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으로 분화

 

▲허정숙과 최창익, 중국 남경에서 결혼

허정숙과 최창익은 서울에서부터 사실상 부부나 다름없었지만 1936년 중국 남경에 도착한 후 결혼식을 올렸다. 허정숙으로서는 공식적으로는 세 번째 결혼이고 두 번째 결혼식이었다. 그들을 중화민국 수도 남경까지 오게 한 것은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35년 7월 의열단(김원봉), 신한독립당(지청천), 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최동오), 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개 단체와 당이 합쳐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였다. 김원봉은 서기부장(총서기)을 맡아 핵심 역할을 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창당의 핵심 세력이 좌파 색채가 짙고 창당 세력의 일부가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최창익도 남경 도착 후 민족혁명당에 가담했으나 당의 노선이 자신의 뜻과 다른 것을 알고 1936년 6월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을 결성했다. 결국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계열의 비협조와 질시, 김원봉의 독주와 전횡에 불만을 품은 지청천 계열의 이탈, 노선이 맞지 않은 최창익 계열의 마찰 등으로 출범 본래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그러다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새로운 통일전선운동이 남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의용대, 중국 본토에서 창건된 최초의 독립군 부대

민족주의자 그룹은 김구의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과 지청천이 새로 창당한 조선혁명당이 세를 규합해 1937년 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선)를 결성하고 임시정부 재건에 착수했다. 사회주의자 그룹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해방자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조선청년전위동맹(최창익) 등이 힘을 합쳐 1937년 12월 ‘조선민족전선연맹’(민선)을 결성했다.

민선은 좌파 성격이 강했으나 장개석 정부와 협의해 80여 명의 조선인 청년을 1937년 12월 강서성 성자현 소재 중국군관학교 성자분교 특별반에 입교시켰다. 민선은 이 청년들을 근간으로 삼아 1938년 7월 장개석 정부에 조선의용대 창설 계획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1938년 여름 남경마저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정국이 또다시 요동쳤다. 국민당 정부는 중경으로 철수하고 조선의 항일운동가들은 양자강을 따라 무한으로 이동했다. 김원봉, 허정숙, 최창익도 남경을 빠져나가 무한으로 갔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무한의 한구에서 발대식을 열었다. 중국 본토에서 창건된 최초의 독립군 부대였다.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출범(1940.9)하기 2년 전이었다. 무한은 27년 전 청 왕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이 시작된 곳이었다. 신해혁명의 봉화를 올린 날도 조선의용대가 발대식을 연 10월 10일 쌍십절이었다. 조선의용대 대원은 모두 97명이었다. 본부대와 2개 구대로 편성했다. 대장은 김원봉, 제1구대장은 박효삼, 제2구대장은 이익성이 맡았다. 최창익은 지도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은 부녀복무대장을 맡았으나 허정숙은 입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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