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립운동가 신규식 자결

나라가 기울고 있을 때 신규식은 관립한어학교와 육군무관학교에서 문·무를 쌓으며 국권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국은 이미 바람 앞의 등잔불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때는 의병을 일으켜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흘을 굶다가 이내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은 구했으나 오른쪽 눈의 시신경에 이상이 생겨 애꾸가 됐다. 신규식은 “그래,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자”며 흘겨볼 예(睨)자와 볼 관(觀)자를 써서 ‘예관(睨觀)’을 호로 삼았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됐을 때도 자살을 기도했으나 이번에는 대종교 종사 나철이 그를 구했다. 신규식은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 쑨원의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고 신해혁명에도 참가했다. “중국 혁명의 성공이 조선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결국 쑨원과의 ‘연대’는 나중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쑨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때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임정이 곧 분란에 휩싸이자 신규식은 이를 통탄하며 25일간 불식(不食)·불언(不言)·불약(不藥)을 고집했다. 결국 신규식은 1922년 9월 25일, 마지막 남은 숨을 끊고 42세로 이승을 떠났다. 숨을 거두며 힘없이 새어나온 “정부… 정부…”가 마지막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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