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민주당 신파 ‘민주당’으로 원내교섭단체 등록

1960년, 신파·구파로 갈려 한 지붕 두 가족을 이룬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구파’는 주로 한민당·민국당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었고, ‘신파’는 원내자유당이나 자유당 탈당파에서 민주당으로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구파 중심에는 신익희·조병옥이, 신파 중심에는 장면이 있었다. 이들은 민주당으로 통합되기 전부터 소속당이 달라 화학적 결합에 애를 먹었지만 성향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구파는 우국지사적 기질에 보수적이며 배타적이었고, 신파는 관료·법관·금융인 등의 테크노크라트였다.

1955년 통합야당으로 출범할 때부터 민주당에 내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승만 독재에 맞선다는 대의가 늘 우선했던 터라 첨예한 갈등도 그럭저럭 헤쳐나갔다. 그러나 민주당을 야당에서 여당으로 탈바꿈시켜준 4·19가 문제였다. 자유당이 몰락한 공백을 선점하기 위한 밥그릇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곧 치러진 7·29총선 결과, 민주당은 예상대로 압승을 거둬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그 과정에서의 앙금이 너무 컸다. 내각제 하에서 실권을 가진 총리 자리를 장악하려면 자파(自派) 의원을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켜야 했기 때문에 양측은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윤보선(구파)과 장면(신파) 지역구에까지 같은 당 소속의 후보를 출마시킬 정도로 분열상이 극에 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면이 총리가 되고 신·구파 간의 연립내각 구성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양측의 간극은 더욱 벌어졌다.

총리 자리를 빼앗긴 구파가 먼저 반격을 시도했다. 1960년 8월 31일 ‘구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고 민주당을 뛰쳐나간 것이다. 이것이 공식적인 별거의 시작이었다면 9월 23일 신파가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따로 등록한 것은 공식적인 이혼 선언이었다. 결국 신파는 여당으로, 구파는 야당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이 과정에서 2공화국의 불화는 더욱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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