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만주 전역을 잠식해 들어가자 그해 12월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지린(吉林)성 자위군과 연합군 결성을 합의하는 등 한·중(韓․中) 간에도 연합전선 움직임이 빨라졌다. 한국독립군은 1931년 11월 민족주의 세력의 한국독립당에 의해 결성된 독립군 부대로 주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대일항쟁을 전개하고 중국의 지린성 자위군은 지린성을 중심으로 ‘반만·항일(反滿·抗日)’에 뛰어든 중국인 부대였다. 당시 독립군의 규모는 6개 대대 1600명이나 되는 적지않은 규모였다. 연합군은 공격 목표를 ‘쌍성보’로 정했다.
쌍성보는 창춘∼하얼빈을 잇는 하창선(哈長線) 철도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지린성과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물산이 모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만주국의 초비단 부대 3000여 명과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군이 지키고 있어 수비는 견고했다. 한․중 연합군은 1932년 9월 19일 쌍성보 근처에 집결한 후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지린성 자위군 1군·2군은 각각 동문·남문으로, 한국독립군과 자위군 산하의 고봉림부대는 서문을 공격했다. 한국독립군은 이미 1∼2월에 자위군 산하의 사복성부대와 연합해 서란현전투를 치른 바 있어 중국군과 호흡이 잘 맞았다.
2시간에 걸친 총공세로 만주군은 1000명이 다치거나 죽었고 2000명이 투항했다. 독립군과 고봉림군의 사상자는 각각 30∼40명에 불과했으니 대승이었다. 이후 쌍성보는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혼전을 거듭하다 결국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에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