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고바우 영감’은 한국 현대사 격동기에 50년간 신문 독자와 함께 울고 웃은 시사만화의 대명사… 고바우의 산모(産母) 김성환 화백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났다

↑ ‘고바우 영감’ 주요 순간들. 왼쪽부터 동아일보 첫 연재(1955년 2월 1일), 경무대 똥통 사건(1958년 1월 23일), 김성환 화백, 국권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사람을 다룬 ‘엿장수 마음'(1961년 5월 24일), 조선일보 첫 연재(1980년 9월 11일)

   

by 김지지

 

한국 시사만화 대명사 ‘고바우 영감’의 만화가 김성환씨(1932~2019)가 2019년 9월 8일 87세로 별세했다. ‘고바우 영감’은 6·25전쟁 후 전개된 격동기에 신문 독자와 함께 울고 웃은 한국 시사만화의 대명사였다.

 

‘고바우 영감’이 전국적 인물로 부상한 것은 1955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부터

김성환은 경기 개성에서 태어나 경복중(6년제)에서 미술반장을 지낼 정도로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만화에 더 관심이 많아 경복중 시절이던 1949년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4컷 만화를 ‘연합신문’에 연재(15회)하면서 시사만화가로 첫 발을 내디뎠다. 6·25전쟁 때는 피난을 가지 못해 9·28 서울 수복이 될 때까지 숨어지내야 했다. 그때 정릉 다락방에서 만화 주인공 200여 명을 그렸는데 훗날 여기서 골라낸 인물이 ‘고바우 영감’, ‘고사리군’, ‘박참봉’, ‘허박사’, ‘꺼꾸리군 장다리군’ 등이다.

‘고바우 영감’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초 대구에서 발행하던 ‘만화신보’에서 첫 선을 보였으나 전쟁 중이라 계속 등장하지는 못했다. 김성환은 1950년 말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의 군속 신분으로 편입되어 계몽 포스터와 삐라를 그리면서도 군 신문 ‘승리일보’의 부록인 주간 ‘만화승리’에 ‘김멍텅구리’를 연재했다. 김성환은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방 전투부대 참호에서도 전쟁기록화를 105점 남겼다. 이 그림들은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처음 소장한 만화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 군 미술대에는 미대 교수 등 40여 명이 등록되어 있었지만 최전방에서 그림을 그린 사람은 김성환이 유일했다. 1953년에는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학생잡지 ‘학원’에 연재해 인기를 끌었다.

1950년 6월 28일. 탱크를 앞세우고 침공한 북한군 병력들이 김성환 화백의 자택 근처인 서울 성북구 돈암동 큰길에 들어서는 모습을 그렸다. 끊어져 늘어진 전차 전력선, 부러진 가로수들이 보인다.

 

1953년 학생잡지 ‘학원’에 연재되어 큰인기 끈 ‘꺼꾸리군 장다리군’

 

김성환은  1955년 장차 그의 분신이 될 ‘고바우 영감’의 활동 무대를 동아일보로 옮겨 1955년 2월 1일부터 연재했다. 고바우가 인기를 끌자 당초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던 다른 신문들도 너도나도 시사만화를 연재했다.

연재 초기 ‘고바우’는 가정과 직장생활을 담은 순수한 유머 만화였으나 독자들의 취향에 맞춰 시사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가시밭길의 시작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시사만화의 대부로 올라서는 출발점이었다.

고바우 영감

 

‘고바우 영감’ 연재는 가시밭길의 시작이자 한국 시사만화의 대부로 올라서는 출발점

고바우가 현실정치를 아프게 꼬집을 때는 여지없이 권력으로부터 반응이 왔다. 대표적인 것이 과잉충성하고 아첨하는 세도가들의 이면을 풍자한 ‘경무대 똥통 사건’(1958.1.23) 만화였다. 경무대에서 똥을 치는 사람들에게까지 깍듯이 인사하는 당시 행태를 그린 이 만화는 가짜 이강석 사건에서 알 수 있듯 경무대의 ‘경’자만 들어도 사족을 못 쓰는 관리들의 꼴불견을 꼬집은 것이다.

이 만화로 김성환은 4일 동안 문초를 당했지만 사실 김성환은 그런 사태가 오기를 내심 기대하며 만화를 그렸다. 외국 만화들도 필화 사건을 겪은 후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이승만 정권을 상대로 함정을 판 것인데 이승만 정부가 걸려든 것이다. ‘고바우 영감’은 5·16 후인 1961년 5월 21일자에서도 국권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사람들의 ‘엿장수 마음’을 꼬집었다가 지면에서 1주일 동안 사라졌다.

김성환은 그 후 계엄의 암울한 터널 속에서도 박정희 군사정부와 만화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1963년 봄부터 8개월간 스스로 펜을 놓았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만 검찰에 2번, 중앙정보부에 2번 불려갔다. 그의 만화가 신문에서 사라질 때는 어김없이 해외 언론이 반응을 보였다. 1963년 AP통신은 ‘말을 함부로 못하게 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군사정부의 언론탄압 소식과 함께 고바우 만화를 소개했고, 1973년 산케이신문은 고바우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토픽으로 전하기도 했다.

김성환 화백이 조선일보 시절, ‘고바우 영감’을 그리고 있다.(출처 KBS 캡쳐)

 

고바우 영감 머리의 한 올 털은 세태를 읽어내는 이심전심 안테나

‘고바우 영감’이 1955년 처음 등장했을 때는 당시 중류층인 두루마기에 중절모자 차림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세태에 맞춰 양복으로 갈아입었고 전쟁 탓에 수척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살도 오르고 담배도 곧잘 피웠으며 술집도 자주 드나들었다.

독자들은 고바우 영감 머리에 나 있는 한 올의 털 모양으로도 풍자내용을 파악했다. 털이 낚시바늘처럼 굽었느냐, 빳빳이 섰느냐, 아니면 나선형으로 구불구불하느냐에 따라 세태를 읽어낸 속칭 이심전심 안테나였던 것이다. ‘고바우 영감’은 이처럼 권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해학으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고바우 영감이 고개를 넘다가 고개를 다쳐서 고약을 발랐더니 고만 낫더래’라는 작자 미상의 동요 ‘고바우 영감’이 고무줄놀이에까지 퍼질 정도였다.

김성환은 1980년 8월 9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7971회를 끝으로 정든 지면을 떠났다. 신군부의 ‘언론계 대량 해직’이란 철퇴를 맞은 33명 속에 끼여 타의에 의해 폐업을 선언한 것이다. 해직은 곧 취소되었지만 동아일보 내부 사정 등으로 복직이 지연되자 조선일보에 둥지를 틀고 그해 9월 11일부터 다시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으로 점철된 고바우 영감을 선보였다.

조선일보에서 1987년 1만 회를 돌파하고 정년퇴직한 뒤에는 1992년 9월 문화일보로 옮겨 연재했다가 2000년 9월 29일 영영 신문독자 곁을 떠났다. 그동안 연재한 횟수만 1만 4,139회에 달해 일간신문에 연재된 단일 작가의 4컷짜리 시사만화 창작물로는 세계 최장의 기록을 수립, 단일 만화 최장 연재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고바우 영감의 원화(原畵) 1만 743장은 2013년 2월 근대 만화 최초로 등록문화재(제538호)가 되었고 2005년 고바우 탄생 50주년을 기념한 우표가 발행되었다. 김성환은 세계적인 우표 수집가로도 정평이 나 있으며 화가로서도 재능이 많아 동양화와 서양화 개인전을 10여 차례나 열었다.

고바우 우표

 

김성환이 그린 판자촌 그림

 

‘고바우 영감’은 세계적인 정치시사만화로도 주목을 받았다. 1977년 ‘고바우의 언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이 하버드대에서 나오고 2006년 ‘고바우 작가’를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이 일본에서도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2003년 ‘만화 한국 현대사―고바우 영감의 50년’이라는 단행본도 출간되었다.

고바우영감 50주년을 축하하는 만화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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