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우리나라 최초 신부 김대건 순교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서양 학문을 배운 최초의 유학생이었고 서양말을 쓰고 말하는데 익숙했다. 중국어와 라틴어에 능숙했고 프랑스어도 자연스러웠으며 영어까지 구사했다. 1836년 12월 14살 김대건은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떠난다. 육로로 8개월 만에 도착한 그곳에서 천주교 신학과 서양철학을 배웠다.

그가 없는 1839년 조선에서는 3명의 프랑스 신부와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참혹하게 죽어갔다. 이 기해박해 때 김대건의 아버지도 참수됐다. 1845년 1월, 김대건은 외국인 신부의 입국 루트를 뚫을 목적으로 두만강을 넘어 조선에 잠입했으나 여전한 탄압 분위기와 감시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중국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한국인으로는 첫 사제 서품을 받는다. 9년 동안 이국 땅에서 학업을 쌓은 끝에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된 것이다.

8월 24일 그는 완탕신학교 성당에서 조선교구 주교 신부의 보좌신부로 감격적인 첫 미사를 올렸다. 그해 10월 김대건은 마침내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충청도로 입국하는데 성공, 서울과 고향을 오가며 활발한 전도활동을 하고 미사를 집전했으나 채 1년도 안돼 꿈이 좌절되고 만다. 1846년 6월 5일 서해안 순위도에서 체포된 것이다. 다행히 권세를 누리며 천주교 박해에 앞장섰던 풍양조씨의 세도가 막을 내릴 때여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충청도 앞바다에 출몰한 프랑스 함대가 기해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신부 문제를 조선 정부에 따지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 정부는 김대건의 참수형을 결정했다. 김대건은 1846년 9월 16일 정부의 금령을 어기고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한강 새남터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2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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