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유엔군 6·25 영천전투 승리

6·25 발발과 함께 후퇴를 거듭해온 유엔군과 국군이 낙동강전선에 배수의 진을 친 것은 8월 5일이었다.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였다.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장악한 북한군은 부산까지 점령할 태세로 8월 8일 총공세를 시작했다. 미군은 왜관∼창녕∼마산선을 막아섰고 한국군은 왜관∼낙정리(의성군)∼영덕선을 지켰다. 다부동과 포항에서의 치열한 전투에 이어 9월 4일 경북 영천에서 밀고 당기는 대혈전이 시작됐다.

영천은 대구·포항·경주·안동을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로 낙동강 공방전의 최후 결전장이었다. 영천이 뚫릴 경우 미군이 한국군 2개 사단과 민간인 10만 명을 괌이나 하와이로 철수할 계획을 극비리에 세워놓을 만큼 영천전투는 건곤일척의 승부처였다. 그러나 영천을 두 번 빼앗기고 두 번 되찾는 공방전 끝에 9월 13일 유엔군과 국군이 마침내 영천을 점령함으로써 철수는 취소됐고 대역전극의 발판이 마련됐다.

절체절명의 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날, 7만 5000여 명의 유엔군도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최대·최고의 승부수였다. 9월 15일 인천에서 낭보가 전해지자 9월 16일 상승세를 탄 유엔군과 우린 군의 총반격이 시작됐다. 전세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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