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비운의 화가 이중섭 사망

이중섭의 삶은 6·25를 전후해 둘로 나뉜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던 젊은 시절과 월남 이후 겪어야 했던 일련의 비극적인 삶이다. 때문에 그가 ‘비운의 화가’로 불린 것은 6·25부터 40세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의 6년 동안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각광받던 이중섭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3년이었다. 2년 뒤 이중섭을 쫓아온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하고 함남 원산에 둥지를 틀었다. 짧았지만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분단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사업가 형이 처형을 당하고 북한의 미술평론가들이 “인민의 적”으로 그를 공격했다. 이중섭은 1950년 12월, 가족과 함께 원산을 떠나 고행길을 시작했다. 부산을 거쳐 제주에 일시 머문 이중섭은 대표작 ‘황소’와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을 그리며 모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1952년 7월에 일본으로 떠나면서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홀로된 이중섭은 고독을 곱씹으며 방랑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붓을 잡았다. 대폿집에서도 그렸고, 부두에서도 짐을 부리다 짬이 나면 그렸다. 종이가 없으면 담뱃갑 은종이에도 그렸다. 그러나 이 시기 거의 매일 계속되는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은 결국 이중섭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다. 1956년 9월 6일, 이중섭은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고달픈 생애를 접었다. 시신은 무연고자로 3일 간이나 방치됐고, 침대에는 밀린 18만 원의 입원비 계산서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지인들이 수습한 뼈가루의 반은 일본의 아내에게 보내졌고 나머지 반은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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