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중섭 첫 개인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열려… 전후의 궁핍한 시대인데도 대성황 이뤄

↑ 이중섭

 

타고난 개성과 뛰어난 조형감각을 지닌 멋쟁이

이중섭(1916~1956)은 ‘한국의 빈센트 반 고흐’라고 불릴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다. 40년의 짧은 생이었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국민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약 320여점이다. 유화 60여점, 은지화 120점, 드로잉 150점, 엽서화 88점 등이다. 이중섭의 삶은 6·25를 전후해 둘로 나뉜다. 부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젊은 시절과 1950년 12월 피란 이후 겪은 일련의 비극적인 삶이 극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비운의 화가’로 불리는 기간은 1950년 6·25부터 1956년 40세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6년이다.

이중섭은 평남 평원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가 작고했지만 평양농공은행장을 지낸 유력자 집안의 외손자로 어려서부터 스케이트와 음악 미술을 마음껏 하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어 평양 제2고등보통학교에 두 차례 연이어 낙방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외할아버지가 평소 친분이 있던 오산고보 설립자 이승훈 선생에게 부탁해 평북 정주의 오산고보에 입학했다. 오산고보 시절, 이중섭은 하루 종일 들판에 나가 풀을 뜯는 소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런 그를 친구들은 “소에 미친 녀석”이라고 놀렸다.

이중섭 작 ‘흰소'(1954년)

 

이중섭은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에는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데이코쿠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정학을 당해 1936년 도쿄문화학원(분카가쿠인)으로 학적을 옮겼다. 그곳에서 그의 별명은 ‘동방의 루오’였다. 조르주 루오는 예수를 주제로 그린 연작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프랑스 화가였다. 이중섭의 그림은 루오의 그림처럼 선이 굵고 힘찬 율동으로 꿈틀거렸다. 이중섭은 178㎝의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가곡도 곧잘 뽑았고, 보들레르의 시도 줄줄 외웠다. 이중섭은 타고난 개성과 뛰어난 조형감각을 지닌 멋쟁이였다. 평소 옷이나 생활도구 등도 취향에 맞게 직접 만들어 입고 썼다. 트레이드마크로 여겨졌던 파이프 역시 직접 깎아 만들었으며, 이를 선물하길 즐겼다. 이런 이중섭을 한 일본인 여성이 흠모했으니 도쿄문화학원 2년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였다. 그녀는 부유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화가 지망생이었다.

이중섭은 1940년 3월 도쿄문화학원을 졸업하고 그해 10월 서울 부민회관에서 개최된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자유전)에 주로 소를 소재로 한 그림을 출품해 협회상을 받았다. 1943년 제7회 자유전에서는 ‘망월’로 태양상을 수상했다. 자유미술가협회는 1937년 7월 일본에서 창립된 화가들의 모임으로 우리나라 화가 중에는 김환기, 문학수, 유영국, 이중섭 등이 참여했다.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일본 전역이 점차 포화에 휩싸이자 이중섭은 1943년 귀국, 가족이 살고 있는 함남 원산에 화실을 마련했다. 원산에서도 하루 종일 들판에 나가 소를 그렸다. 남의 집 소를 너무 열심히 관찰하다가 그만 소도둑으로 몰려서 잡혀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일본에 있는 마사코 생각뿐이었다. 틈만 나면 엽서에 그리움을 담은 그림을 그려 보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4월 마사코가 홀로 현해탄을 건너 부산을 거쳐 서울로 왔다. 이중섭은 서울로 달려가 마사코를 데리고 원산으로 돌아와 한 달 후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 이름은 남쪽 나라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의 ‘이남덕’으로 지어주었다. 원산에 살 때 큰아들 태현(야마모토 야스가다·1947년생)과 두 살 터울인 태성이 태어났다.

이중섭 결혼 모습

 

이중섭의 인생 화두는 황소였고 그 출발은 쇠불알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에 따른 남북 분단은 이중섭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원산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백화점을 운영하며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12살 위 형이 1946년 원산 내무서로 끌려가 소식이 끊긴 것이다. 실종으로 처리되었지만 누가 보아도 반동으로 몰린 처형이었다. 북한의 미술평론가들도 “사상에 투철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며 이중섭의 소 그림을 ‘인민의 적’으로 취급했다. 일본 여자와 산다고 친일파라며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중섭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6일 아내와 두 아들, 조카를 데리고 원산발 부산행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이중섭의 가족은 한동안 부산의 피란민 수용소에 머물다가 1951년 4월 제주 서귀포로 옮겨 11개월 동안 살았다. 한 평 남짓한 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배급으로 연명하고 게를 잡아 부족한 배를 채우면서도 ‘황소’ ‘서귀포가 보이는 풍경’ ‘해변의 가족’ 등의 작품을 그렸다. 이중섭의 예술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면서 가정적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이중섭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중섭의 가족은 다시 부산으로 나왔고, 이중섭은 부두 노동이나 운수회사의 인부 노릇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러던 중 아내는 두 아들과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1952년 7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다. 가족과 생이별한 이중섭은 부산에 홀로 남아 낮에는 미군 부대에서 하역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붓을 잡았다. 늦은 밤 판잣집 골방에서도 그리고, 부두에서도 짐을 부리다 짬이 나면 그렸다.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종이가 없으면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 못, 나무 꼬챙이로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그렸고, 슬퍼도 그렸다. 때로는 부산을 벗어나 대구, 통영 등지를 오가며 구상이나 김광균 등 시인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다.

이중섭의 소 사랑은 각별했다. 그는 암소는 그리지 않고 힘찬 율동의 굵은 선으로 강조된 황소 그림만 그렸다. 어느날 이중섭의 그림을 본 시인 유치환이 “당신은 쇠불알을 그리고 싶어 소를 그리는 거 아니요?”라고 농담 삼아 물었다. 이중섭이 대꾸했다. “쇠불알 때문에 소를 그리지요. 쇠불알은 우주예요. 그 안에 소도 들어 있고 사람도 들어 있고 삼라만상이 다 들어 있지요. 그 말랑말랑하고 통통한 것 안에 말이외다.” 이른바 이중섭이 말하는 ‘쇠불알의 철학’이었다. 이처럼 이중섭의 인생 화두는 황소였고 그 출발은 쇠불알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마지막 4년, 이중섭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일본의 부인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그림편지에 쏟아냈다. ‘나의 최대 최미(最美)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최애(最愛)의 사람,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군!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소.’ ‘세상에 나만큼 아내에게 이토록이나 열광적으로 만나고 싶어서… 머리까지 머엉해버립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사랑해서 가슴 가득 설레는 이 열렬한 사모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그림편지

 

“슬프다 못해 웃음을 자아내는 그림이 의젓하게 보여 괴로울 지경”

이중섭은 가족이 보고 싶어 1953년 7월 외항 선원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을 만났으나 비자가 없어 1주일 만에 쫓기듯이 다시 돌아왔다. 이후 죽는 날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이중섭은 다시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로 빠져들었고 몸과 마음은 더욱 황폐해졌다. 그래도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 살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개인전을 준비했다. 첫 개인전은 1955년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미도파화랑에서 열었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척박하고 극도로 궁핍한 시대인데도 그의 그림 45점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조선일보는 1월 29일자 기사에서 “슬프다 못해 웃음을 자아내는 그림이 의젓하게 보여 오히려 괴로울 지경”이라고 평했다. 격찬 속에서 이중섭의 그림은 26점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주로 외상으로 팔리다보니 드문드문 푼돈으로 들어왔다. 그 돈은 또다시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데 탕진되었다.

이중섭 ‘자화상'(1955년)

 

이중섭은 1955년 5월 대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돈과는 여전히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대구 미국문화원장 아서 맥타가트가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은지화 3점을 구입·보관했다가 이중섭 사후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덕분에 죽어서일지언정 한국 화가 최초로 뉴욕현대미술관에 그림이 영구 소장되는 영예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 무렵 이중섭의 상태는 몸과 마음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일정한 거처없이 떠돌기 일쑤였고 폭음과 영양실조로 몸은 망가졌다. 황달, 영양실조, 간염이 계속 이어지고 우울증과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났다. 지인들은 이런 이중섭을 대구 성가병원, 서울의 수도육군병원, 삼선교의 성베드로 병원, 청량리의 뇌병원 등으로 옮겨가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병은 더욱 악화했다.

이중섭이 마지막으로 옮겨간 곳은 1956년 7월 서대문 적십자병원이었다. 친구들이 무더위에 지쳐 이중섭을 잠시 있고 있던 1956년 9월 6일, 결국 그곳에서 40세로 눈을 감았다. 침대에는 밀린 18만 환의 입원비 계산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시신은 ‘간장염으로 사망한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3일 동안 영안실에 방치되어 있다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인들에 의해 화장터로 보내졌다. 아내는 시인 김광균이 보낸 전보로 이중섭의 죽음을 알았으나 국교 단절 때문에 한국에 갈 수 없었다. 유골의 반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에 온 시인 구상과 양명문을 통해 일본의 아내에게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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