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북한 김일성이 주도한 ‘8월 종파’ 사건

1956년, 북한에서 전후 복구 건설을 둘러싼 당내 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장의 소비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경공업에 투자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위해 중공업에 투자할 것인가로 의견이 갈렸다.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론을 펼쳤고 중국의 지원을 받는 연안파는 반중공업 노선을 견지했다. 경공업을 등한시하다보니 북한 주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경제난을 핑계로 반김일성 깃발 아래 힘을 결집시켰다. 마침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여파가 북한에까지 미쳐 개인숭배에 대한 거부감이 싹트고 있을 때였다.

반김 세력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 김일성이 북한을 비운 사이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김일성은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자금을 마련하기위해 1956년 6월 1일부터 50여일 간 소련과 동구권을 방문, 원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김일성은 급거 귀국, 반격을 준비했다. 8월 30일 열린 전원회의가 신호탄이었다. 반김 세력은 회의 초반에 중공업 우선정책과 김일성 개인숭배 등을 비판하며 일제히 들고 일어났으나 이내 김일성파의 조직적인 저항에 밀려 위기에 몰렸다. 자신들의 세를 과신한 패착이었다. 결국 주동자들이 중국으로 도주하면서 평양은 자연스레 김일성의 차지가 됐다.

8월 전원회의에서 분출된 사건이라 해서 붙여진 ‘8월 종파사건’은 결국 김일성의 승리로 1라운드를 매듭지었지만 김일성에게는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소련과 중국이 8월 전원회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김일성에 압력을 가하면서 2라운드가 시작됐다. 이 또한 김일성의 승리로 끝이 났고, 반대파들은 숙청되거나 쫓겨났다. 이로써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입김에서 벗어나 자주노선을 걸을 수 있게 됐고 마침내 김일성 유일 지도체제로의 첫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김일성 집권사에서 최대위기로 일컬어지는 권력투쟁사건이었고 북한 역사에서 유일했던 조직적인 반김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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