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후 첫 정간

총독부는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신문 발간을 허락하고서도 곳곳에 촘촘한 그물망을 쳐놓아 행여라도 논조가 수틀리면 사사건건 탄압을 가했다. 특히 일본 황실의 존엄을 손상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할 우려가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탄압에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됐다. 신문발행 전에는 간담·주의·경고 등으로 주눅들게 하고 신문발행 후에는 삭제·압수·정간·폐간 등으로 옭아맸다.

과정은 이랬다. 신문인쇄 즉시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신문이 납본되면 도서과는 지체없이 신문을 검열해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사에 대해 1차로 삭제명령을 내린다. 신문이 모두 인쇄된 뒤라도 문제 기사가 보일 경우 즉시 관할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 압수를 통보하면 경찰은 득달같이 달려와 해당신문을 압수하거나 신문 배달을 원천 봉쇄한다. 이렇게 두 신문이 1940년 강제폐간될 때까지 압수당한 기사건수만 조선일보 471건, 동아일보 437건에 달했다.

첫 압수 신문은 동아일보의 13호였다. 1920년 4월 15일자 ‘평양에서 만세소요’라는 기사가 문제가 돼 창간 2주만에 배포금지 처분을 받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4월 28일자 제4호에 실린 ‘어약혼(御約婚) 있었던 민낭자(閔娘子), 지금부터의 각오’라는 기사로 첫 압수처분을 받았다. 일회성에 그친 압수보다 더 강한 언론탄압책이 정간이다. 먼저 정간을 당한 것은 조선일보였다. 1920년 8월27일자에 실린 ‘자연의 화(化)’라는 사설로 민간신문 최초의 정간을 당한 것이다. 1차 정간은 일주일만에 풀렸으나 조선일보는 9월 5일자에서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라는 사설로 또 정간을 당했다. 1차 정간을 정면으로 비판한 탓에 이번에는 무기정간이었다. 오기라면 오기였고 기개라면 기개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9월 25일자 ‘제사(祭祀) 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로 첫 정간을 당했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본 황실의 상징인 거울, 옥구슬, 칼 등 3종의 신기(神器)를 비판했다는 트집을 잡았다. 일제는 20년 동안 조선일보·동아일보에 각각 4차례나 정간조치를 취한 것으로도 부족해 1940년 8월에는 두 신문사에 신문발행을 중단시키는 폐간의 칼을 들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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