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우규 의사에 대한 일제의 감시대상인물카드
by 김지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대부분은 20~30대 열혈 청년이었다. 윤봉길·조명하 의사는 의거 당시 각각 24세·23세였고, 이봉창 의사는 32세, 김상옥 의사는 33세, 나석주 의사는 34세였다. 일본 황궁의 정문 앞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 역시 39세였다. 그런데 환갑을 넘은 60대 중반 나이에 목숨을 던진 이가 있었으니 강우규(1855~1920) 의사였다.
참고로 의사, 열사, 지사의 차이를 알아본다. ‘의사(義士)’는 무기를 들고 나라를 위해 뜻을 펼치다 순국하신 분으로 안중근·이봉창·윤봉길 의사 등이 해당한다. ‘열사(烈士)’는 무기 없이 맨몸으로 저항하다 돌아가신 분으로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이다. ‘지사(志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분으로 안창호 지사 등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보고 싶지 않은 물건뿐이구나”
강우규는 평남 덕천군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누나 집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서당 공부를 했을 뿐 배운 것은 없었지만 어깨너머 한방 지식을 익혀 약간의 의술은 할 수 있었다. 강우규는 30세이던 1885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해 잡화상을 운영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장사꾼으로 평범하게 살았을 강우규의 인생에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해준 인물은 국권 회복 운동과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1908년 홍원을 방문한 18살 연하의 이동휘였다.
이동휘는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활동하던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 퇴위했을 때 강화도 군민의 봉기 배후로 지목되어 4개월간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후 서북학회와 신민회를 통해 구국 운동을 펼쳤다. 함경도 전역을 순행하며 서북학회 지회와 학교 설립 운동을 펼치고 기독교 전교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 일환이었다. 강우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도 이동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강우규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국이 일제의 총칼 아래 놓이게 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보고 싶지 않은 물건”이라며 그해 가을 큰아들 가족을 러시아 연해주로 먼저 보내고 자신은 1911년 봄 북간도 두도구로 이주했다. 이후 각지를 유랑하며 한인촌에 소재한 교회에 나가고 한방의술로 환자를 진료했다. 따로 살던 강우규와 아들 가족은 1915년 한곳에 모여 살다가 1917년 북만주 길림성 요하현 벽촌으로 이주했다. 그곳은 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연해주와 마주하고 있어 중국 만주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노인동맹단, 단원의 나이를 46세 이상 70세 이하로 제한했지만 70대도 가입
강우규는 독립운동 기지를 염두에 두고 그곳에 신흥동이라는 한인촌을 개척했다. 신흥동은 불과 1년 만에 100여 호로 늘어나 강우규는 그곳에 광동학교를 지어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기독교 전도에 힘썼다. 신흥동은 점차 러시아와 북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군의 근거지 역할을 하고 강우규의 집은 독립단원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사랑방 구실을 했다.
3·1 운동 소식이 알려진 1919년 3월 4일에는 신흥동 동포들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강우규는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는데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한 달 전 결성한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기 위해서였다. 노인동맹단은 1919년 3월 26일 김치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운영하던 한약방 덕창국에서 결성되었다. 김치보는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홍범도와 유상돈 등 16명이 의사원에 선임되었다.

노인동맹단은 실전에 참여하는 청년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단원들의 나이를 46세 이상 70세 이하로 제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70세를 넘는 이도 있었고, 여성도 가세했다. 이후 많은 조선인이 단원으로 가입했다. 미국에 머물던 서재필에게 총재를 맡아 달라고 요청한 문서를 보면 이름 아래 지장·도장을 찍거나 자필로 서명한 2005명의 명단이 적혀 있을 정도였다.
노인동맹단은 대표자를 조선총독부에 파견해 독립 의지를 알리는 한편 결사대를 국내에 보내 3·1운동을 확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동휘의 부친인 68세의 이발(이승교)은 물론 74세의 정치윤이 자원하자 40~50대의 단원 3명도 가세했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936년 당시 한국인 평균수명이 42.6세(남자 40.6, 여자 44.7세)인 것을 감안하면 정치윤과 이발은 노인 중에서도 상노인이었다.

폭탄을 기저귀 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원산항에 도착
노인동맹단은 그해 5월 이들 5명을 국내로 파견했다. 이들의 품속에는 일본 천황과 조선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과 함께 노인동맹단 창립 취지문 수백 장이 숨겨 있었다. 이들은 5월 31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그 순간 이발은 “치욕을 당할 수 없다”며 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일본 사법당국은 고령의 정치윤과 이발을 불기소 처분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려보냈다. 윤여옥(58세)과 안태순(47세)에게는 징역 1년, 차대유(차대륜·59세)에게는 징역 8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그 무렵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떠나고 후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사실이 노인동맹단에 전해졌다. 노인동맹단이 후임 총독을 처단하자고 모의할 때 강우규가 자원해 그 중차대한 임무를 맡았다.
강우규는 러시아인에게 구입한 폭탄을 기저귀 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1919년 6월 14일 원산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거사 자금을 마련하고 23세의 청년 독립운동가 허형을 소개받아 8월 5일 그와 함께 서울로 잠입했다. 지인의 집에서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사이토 마코토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보고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 근처의 여인숙에 투숙해 거사를 준비했다.
강우규 의사, 환갑을 넘은 60대 중반 나이에 목숨 던져
사이토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부관연락선 ‘신라환’을 타고 부산으로 건너와 하룻밤을 부산에서 머문 뒤 9월 2일 부산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오후 5시쯤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그 시간 강우규는 폭탄을 허리춤에 찬 채 남대문역 다방에서 사이토가 오기를 기다렸다.

사이토는 흰색 해군대장 복장에 군모를 쓰고 가슴에는 훈장을 패용한 모습으로 기차에서 내린 뒤 호위 경찰과 신문기자들 대동하고 남대문역 광장으로 이동했다. 광장에는 사이토 내외가 타고 갈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이토를 태운 마차가 막 출발하는 순간, 인파 속에서 구경꾼인 체하던 강우규가 허리에 차고 있던 폭탄을 마차 근처로 던졌다.
폭탄은 사이토의 마차에서 7보 가량 떨어진, 총독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촬영하던 한 사진기자 바로 옆에서 무서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순간 역 광장 일대에는 사방으로 튄 파편에 맞아 여러 사람이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역 광장은 부상자들의 비명 소리로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은 없었지만 경찰, 신문기자, 철도·차량 관계자 등 37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경상자 가운데는 미국인 여성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목표물인 사이토는 혁대에 작은 파편이 튀겨 혼비백산했을 뿐 신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중상자 가운데 일본 경찰 1명은 사건 발생 9일 만인 9월 11일, 일본 신문기자는 11월 1일에 각각 사망했다.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유시 남겨
일경은 사건 직후 남대문역을 에워싸고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범인은 이미 유유히 사라진 뒤였다. 범인이 설마 환갑이 지난 노인이라고 차마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강우규는 거사 직후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담담한 자세로 그 자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체포해 가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폭탄을 투척하는 것을 본 목격자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자신을 체포하지 않아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강우규는 이집 저집 숨어다니다가 뒤늦게 노인이 범인이라고 파악한 일경의 탐문 수사로 9월 17일 종로구 누하동에서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경찰은 애국지사 탄압으로 악명이 높은 김태석이었다. 비록 거사는 강우규가 단독으로 기획하고 준비하고 결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8명도 혐의자로 체포되었다. 이 중 최자남·허형·오태영 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0년 2월 25일 1심 판결 결과 강우규 사형, 최자남 징역 3년, 허형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오태영은 증거가 충분치 않아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 판결 후 허형은 공소(항소)하지 않았으나 최자남은 공소를 제기했다. 강우규 역시 공소를 제기했는데 이는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4월 26일의 선고 공판 결과는 1심 재판부의 형량과 동일했다. 강우규는 고등법원에 다시 상고했으나 5월 27일 기각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일에 마지막 순간의 심경을 묻는 일본 검사에게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라는 유시를 남겼다. 의거 현장인 옛 서울역사 앞에는 2011년 9월 강우규의 동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