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추송웅, 연극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 초연

1977년, 한국 신극 70년 만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지고 한국 연극사에 새로운 신화가 탄생했다. 신화의 주인공은 기획·제작·연출·장치·연기의 1인 5역을 해낸 연극배우 추송웅이었다. 1941년 경남 고성군에서 4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다른 형제들이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한 수재들인데 반해 키도 작고 사팔뜨기에 공부도 못하는 집안의 골치덩어리였다. 내성적인 성격에 신체적 콤플렉스를 원죄처럼 안고 살았던 그가 선택한 길은 연극이었다.

연극인 생활 15년째, 추송웅은 변변한 수입도 집도 없었지만 아내의 곗돈 75만 원을 쏟아부어 무대 데뷔 15년을 자축하기로 한다. 1963년 연극에 투신한 이래 1975년까지 벌어들인 58만8600원이 추송웅의 총수입이었다. 1976년은 그나마 TV에 얼굴이 알려진 덕에 거금 112만 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산문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를 무대를 올리기로 한 추송웅은 1977년 3월부터 6개월 동안 틈만 나면 창경원으로 달려가 원숭이를 멀뚱이 바라보며 자신을 원숭이 ‘피이터’로 탈바꿈시켜 나갔다. 그의 말마따나 “원숭이를 몸에 넣는 동화(同化)작업”의 연속이었다. 1977년 8월 20일,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이터의 고백’이 객석 130석도 안되는 서울 삼일로 창고극장에 올려졌다.

연극은 첫날부터 대박을 터뜨렸다. 보름만에 예매표가 1만 장 이상이나 팔려 1000만 원의 수입을 올렸지만 시작일 뿐이었다. 공연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 무려 482회나 계속돼 15만2000명의 관객들이 그를 찾았다. 그는 이어 1인6역을 맡은 ‘우리들의 광대’도 제작, 1984년까지 512회 23만5000명의 관객을 모아 ‘1000회 모노드라마 출연’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라는 찬사와 관객들의 환호와는 달리 평론가들로부터는 ‘상업주의 연극의 표본’ ‘관객의 거짓 욕망에 야합한 배우’라는 호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무대 위에 모두 소진한 탓일까. 추송웅은 1985년 12월 29일, 44세 나이로 눈을 감는다. 묘비엔 이렇게 씌어있다. ‘빨간 피터, 우리들의 광대, 영원한 연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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