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장준하 의문의 실족사

장준하의 57년 삶은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불의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참지식인의 전범이었다. 일본 유학시절이던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돼 관동군에 배속됐으나 그해 7월 김준엽 등과 함께 부대를 탈출, 7개월 동안 장장6000리(2400㎞)나 되는 중국 대륙을 횡단하며 중칭(重慶)의 광복군 부대에 합류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였고, 중국에서는 미 전략첩보부대(OSS)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국내잠입을 기다리다 일본의 패망으로 소망을 접어야 하는 안타까운 순간을 맞기도 했다.

1953년 4월 사상계를 창간해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섰으나 곧 맞딱드릴 박정희와의 격한 대립에 비하면 고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에게 박정희는 독립투사를 학살한 일본군 장교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였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천적’이라는 말을 들으며 박 대통령을 몰아부쳤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때는 박정희를 “밀수왕초”라고 공격했고, 1967년 월남전 참전을 앞두고는 “매혈자”라고 몰아붙였다. 이후 장준하는 박 대통령의 ‘10월 유신’에 온몸으로 맞서다 감옥을 내집드나들 듯 하며 37회나 구속되고 9번이나 철창행을 겪었다.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975년이었다. 그해 8월 17일 오후 1시20분쯤 경기 포천군의 약사봉을 오른 뒤 하산하던 도중 벼랑 아래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검찰은 유일한 목격자의 진술에 따라 그의 죽음을 단순변사로 처리했다. 시신을 검시한 의사는 오른쪽 귀 뒷부분에 가로세로 5㎝의 상처를 근거로 소견서에 ‘우측 후두부 함몰골절’을 사망원인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사고지점에 접근조차 불가능하고 ▲경사가 70도에다 높이가 14m나 되는 벼랑에서 떨어졌는데도 주검에 외상이 거의 없고 ▲추락 당시 쓰고 있던 안경이나 등에 멘 배낭 속의 보온병이 멀쩡하고 ▲당시 수사당국이 현장검증을 생략한 점 등을 들어 단순 실족사가 아닌 정치적 암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장준하의 죽음은 한동안 공론화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명백한 타살 사건”이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야당(민주당)도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공론화했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 의혹에 그쳤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에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에 나섰으나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변사기록마저 폐기되었다”고 지적은 하면서도 역시 의문투성이의 죽음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진상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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