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카프 시인 임화, 북에서 총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임화의 삶은 한편의 비극적 드라마다. 식민지 시절에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일원이자 서기장으로 박해받는 민중을 노래하다가 카프가 해산(1935년)된 뒤에는 친일의 길을 걷고,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을 주도하며 박헌영과 남로당을 칭송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의 시집 ‘찬가’가 미 군정 하에서 유일하게 판매금지될 정도로 문학전사로서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박헌영을 따라 월북(1947년 11월)한 후부터는 모스크바 유학을 꿈꾸며 스탈린을 우러르고 김일성을 찬미했지만 친일경력과 남로당계라는 꼬리표가 족쇄처럼 따라다녔다. 그래도 단 한 순간 북한에서 임화가 요긴하게 쓰였던 때가 있었다. 임화가 가사를 쓰고 김순남이 곡을 붙인 ‘인민항쟁가’가 빨치산과 인민군의 전의를 북돋은데 쓰인 것이다. 그는 문화공작대의 일원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가 9월 인민군 퇴각 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전선 체험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람이여 전하라’와 같은 힘있고 격조있는 서정시로 남겨졌다. 그러나 이 노래들 역시 나중에 그가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한 뒤부터는 장병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고 염전 사상을 고취시킨 작품으로 격하되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임화는 카프 시절부터 정치 노선과 문학 이념의 차이로 갈등해온 한설야, 이기영 등으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했다. 그의 후원자였던 박헌영 역시 막다른 곳으로 쫓기고 있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들은 남침 실패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던 김일성에게 좋은 먹이감이었다. 임화는 결국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철창 신세를 졌다. 이때 안경을 깨 그 파편으로 자신의 오른쪽 손의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1953년 8월 6일, 김남천·이승엽·이원조·이강국·설정식 등과 함께 총살형에 처해진다. 이후 임화의 이름은 북한의 문학사전이나 문학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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