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치러진 초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196명의 재석의원 중 180표를 얻어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구가 13표, 안재홍이 2표, 무효가 1표였다. 이승만의 당선은 누구나 예견했던 결과였기 때문에 각 정파의 관심은 부통령과 국무총리에 쏠렸다. 부통령은 선출직이었고 국무총리는 임명직이었다. 한민당에서는 부통령 이시영, 총리 김성수를 밀었고 독촉계에서는 부통령 이시영, 총리 신익희를 생각했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임시정부와 북한 출신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승만은 결국 독립운동가로 명망이 높은 임정계열의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투표에서 이시영이 113표(김구 65표, 조만식 10표)로 의결 정족수인 3분의 2를 넘지 못해 2차 투표를 실시했고, 그 결과 이시영은 103표(김구 62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됐다. 김구가 총선거에 불참하고 남북협상이 실패해 정치적 타격을 입었음에도 두 번 다 60표 이상을 얻은 것은 여전히 김구의 정치적 영향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74세의 노정치가 이승만이 중앙청 광장에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7월 24일이었다. “여러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있다가 오늘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다”며 소감을 피력했다. 이승만은 곧바로 이화장에서 조각(組閣)에 착수했다. 그러자 임명직인 국무총리의 선임이 가장 큰 관심사로 대두됐다. 대부분 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를 근거로 한민당의 김성수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았으나 이승만은 예상과 달리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제청했다. 반응은 한마디로 ‘경악’과 ‘의외’였다.

이승만은 이시영이 임정을 대표해 부통령에 당선된 상황에서 북한의 대표성을 감안해 이윤영을 지명했다고 설명했으나 국회에서는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이 목사를 편애해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윤영은 결국 낮은 지명도 탓에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인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승만으로서도 출발부터 상처를 입은 셈이 됐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이범석을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해 실추된 이미지를 겨우 돌려놓았으나 그와 호흡을 같이해온 한민당 인사 가운데는 김도연 한 명만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해 스스로 한민당과의 밀월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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