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희대의 호색한’ 박인수 1심에서 무죄

박인수 진술에 의하면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충격으로 인한 군기문란과 근무지 무단이탈이 문제가 돼 1954년 4월 불명예 제대한 뒤부터 여성편력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학 재학 중 6·25 발발로 군에 입대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해군 대위로 재직시 해군장교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댄스홀을 드나들며 익혔던 사교춤은 제대 후 카사노바의 길로 들어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훤칠한 키, 떡벌어진 어깨에 매너까지 갖춘 데다 제대할 때 반납하지 않은 신분증과 공무집행증도 그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무기였다.

경찰 조사결과 1955년 6월까지 1년 동안 그를 거쳐간 여성은 70여 명. 대학생이 대부분이었고 상류층 출신도 많았다. 재판이 시작되면서 ‘색마’로 낙인찍힌 그의 얼굴을 보려고 5000명에서 1만 여명에 이르는 방청객들이 몰려들어 법정은 늘 아수라장이었다. 1955년 7월 22일, 감춰졌던 성모럴을 만천하에 공개한 박인수에게 1심 선고가 내려졌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판사가 박인수에게 혼인빙자 간음죄에 대해 무죄선고를 내리자 방청석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녀관계에서 언제나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는 의례적인 도식을 지나치게 믿었던 탓이었다.

석방된 박인수가 또다시 구설수에 오른 것은 그가 관계한 70여 명의 여성 중 단 한 명 만이 처녀라고 진술했던 그 여성과 동거를 시작한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결국 검찰의 항고로 박은 2심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대법원 상고가 기각되면서 유죄가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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