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영국 함대, 스페인 무적함대 대파

16세기의 스페인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신항로를 개척한 경제강국이자 해상왕국이었다. 그 무렵의 영국은 아직 힘은 미약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등장하면서 점차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양국은 바다에서 부딪쳤다. 막 바다로 진출하려는 영국과 그 바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스페인이 제해권을 둘러싸고 충돌한 것이다. 양국의 종교갈등도 충돌을 부채질했다. 스페인의 영지였던 네덜란드에서 점차 세력이 커진 신교도 칼뱅파가 독립을 선언(1581년)하자 같은 신교도인 영국이 그들을 도와 스페인의 부아를 돋우었다. 당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이자 전임 왕이었던 메리 1세와 결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양국의 왕은 형부와 처제사이였지만 서로 다른 종교가 두 사람의 불화를 키웠다.

엘리자베스의 후원을 받은 영국의 해적선이 곳곳에서 스페인 상선을 괴롭힌 것도 펠리페를 자극했다. 이 때 등장하는 인물이 해적 출신의 드레이크였다. 그가 스페인 함대에 쫓기면서도 스페인의 식민지와 상선을 닥치는대로 약탈하자 결국 스페인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들이 자랑하는 무적함대를 영국 해협에 파견했다. 130척의 무적함대에는 2500문의 대포가 실렸고, 해병 8000명과 보병 1만9000명이 태워졌다. 영국의 함선은 주로 상선으로 만든 70여 척이 전부였다. 객관적 전력은 누가보아도 영국이 열세였지만 기동성 만큼은 영국이 한 수 위였다. 부사령관에 임명된 드레이크처럼 풍부한 지휘관들의 실전경험도 영국에는 큰 장점이었다.

최초 교전은 1588년 7월 21일 영불해협에서 이뤄졌다. 무적함대는 배의 크기와 성능면에서는 뛰어났지만 움직임이 둔한 반면 영국의 함선은 민첩하게 움직이며 기동전을 펼쳤다. 결국 무적함대는 싸움에 지고 퇴각을 결정했으나 귀로를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 영국 함대를 피한다는 것이 그만 궂은 날씨와 강한 폭풍우로 유명한 북해바다를 선택한 것이다. 전투에서 잃은 것보다 더 많은 병력과 함선을 귀로에서 잃어 결국 무적함대는 50척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전투 이후 스페인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영국은 강대한 해상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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