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여운형 피살… 해방 공간에서 시도된 좌우합작운동도 종지부 찍어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쯤, 몽양 여운형이 탄 자동차가 서울 혜화동 로타리를 도는 순간 갑자기 트럭이 차를 가로막더니 2발의 총탄이 몽양을 향해 발사됐다. 한발은 오른쪽 어깨에, 또 한발은 후두부에 관통되는 바람에 몽양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61세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으로서는 그들 주도하에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됐던 걸림돌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좌익의 박헌영 등 공산당과 우익의 이승만 김구 등의 참여를 끌어내지 못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좌우합작운동도 종지부를 찍었다. 넓게 보면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운동의 종말만이 아니라 온건 좌파의 존립과 발전을 위한 모든 가능성의 종말이기도 했다. 남로당과 차별하기 위해 그해 5월 여운형이 창당한 근로인민당까지 와해되면서 남한의 혁신·진보세력은 이제 남로당 외에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게 됐다. 이는 첨예한 갈등양상을 보이던 이승만과 공산당의 완충지대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피살 당시 동행하고 있던 비서가 범인을 쫓았으나 오히려 경찰이 이를 저지한 것으로 알려져 암살 배후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현장에서 도주한 범인 한지근도 사건발생 77시간 만인 7월 23일 송진우 암살범으로 복역하고 있던 한현우 집에 숨어있다 경찰에 체포돼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경찰은 범행 한달 반 전 평양에서 월남한 한지근이 평소 여운형을 국론분열자로 지목, 기회를 보고 있다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암살에 쓰인 권총이 극우단체인 ‘백의사’ 단장 염동진에게서 건네받은 것이라는 한지근의 자백을 근거로 극우단체 비호아래 암살이 진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한지근은 그해 10월 21일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개성소년원에 수감 중 6·25 때 인민군에 의해 사살됐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몽양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러져 서울 우이동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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