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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⑮] 피렌체(5)와 피사 : 니콜로 마키아벨리, 체사레 보르자, 피사 대성당, 피사 세례당, 피사 종탑

↑ 피사 두오모 광장 전경. 아래쪽에서 위쪽 순으로 피사의 사탑, 피사 두오모, 산 조반니 세례당이고 두오모 오른쪽은 납골당(캄포산토)이다.

 

by 김지지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희망하며 ‘군주론’ 집필

피렌체에는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생가도 있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를 건너 피티 궁전으로 향하는 거리 중간 쯤 오른쪽에 있다. 베키오 다리에서 1분, 시뇨리아 광장에서 5분 거리다.

마키아벨리는 1469년 구이차르디니 거리 18번지에서 태어났으나 당시 생가는 남아 있지 않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독일군과 연합군의 전투 중에 파괴되었다. 대신 건물 입구 위쪽 들보에 적혀 있는 “이 들보는 1944년의 파괴 직후에 발견된 것으로 마키아벨리의 집에 사용되었던 것이다”라는 문장만이 마키아벨리의 생가임을 알려주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집안은 나름 명망가이고 아버지는 법률가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사실상 독학으로 공부해 29세 때 피렌체 정부의 공무원으로 발탁되었다. 당시는 피렌체의 정치와 행정을 오랫동안 쥐락펴락하던 메디치 가문이 타지로 망명한 후 피렌체 정부가 공화정을 선포하고 피에로 소데리니가 ‘곤팔로니에레(행정·사법 수반)’로 피렌체를 이끌던 때였다.

산티 디 티토(1536~1603)가 그린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초상. 104×85㎝

 

마키아벨리는 14년 동안 내무, 병무, 외교 등의 공무를 맡아 유럽의 여러 나라를 두루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유럽을 쥐고 흔든 인물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샤를 8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5개월간 주재할 때는 왕권이 강해지고 안정화되는 프랑스를 살펴보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통치하는 독일을 방문했을 때는 어정쩡한 제국의 문제점을 간파했다. 로마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지켜보았고, 이탈리아에 교황국을 세우려는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처럼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이 권력자였던 적은 없었지만 권력의 핵심 가까이에서 많은 권력자들을 만나 권력의 속성을 속속들이 체험했다. 다만 공직생활은 운명의 여신이 그를 비껴가 오래 하지 못했다. 이유는 이랬다.

1512년, 교황이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대결했다. 이 때문에 친 프랑스적인 피렌체는 스페인군에게 점령되었다. 스페인은 사보나롤라 때문에 피렌체를 떠나 있던 옛 지배자 메디치 가문을 복귀시켰다. 그 덕에 1512년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는 사실상 독재적으로 피렌체를 다스리는 옛 체제를 되살리고 기존의 공화정부 참여자를 숙청했다. 소데리니 정부에서 공직자로 활동한 마키아벨리 역시 해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513년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투옥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혐의를 부인해 곧바로 석방되었다.

 

많은 권력자들을 만나 권력의 속성을 속속들이 체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교외의 농장으로 물러나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고전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전술론’, ‘로마사 논고’ 등의 저작을 집필했다. 그는 혼란에 빠진 이탈리아를 통일할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희망했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와 자신의 외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군주상을 그려나갔다. 그 산물이 ‘군주론’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당시 유럽은 신학적 국가 통일체에서 벗어나 서서히 국민 국가를 형성해 나가던 시대였다. 그런데도 옛 로마제국 시절 서구 세계 전체를 지배했던 이탈리아 반도만은 분열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분열과 혼란은 중세 유럽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는 비록 강력하지는 못해도 어엿한 왕이 있었고 그 왕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가 결속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그런 구심점 없이 대표적인 5개 도시국가로 갈라졌다. 이탈리아는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대립하고 전쟁을 벌였다. 정치체제도 군주국, 공화국, 신정 정치체제 등 다양했다. 결국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맥을 못 추는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1550년 판의 ‘군주론’ 표지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이런 분열과 혼란을 종식시키려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군주의 통치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지러운 이탈리아의 정세 속에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려면 유능한 지도자가 필요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면 때로는 냉혹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가 볼 때 이런 조건에 부합한 인물이 체사레 보르자여서 ‘군주론’의 모델로 삼았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권력을 획득하려면 군주는 잔혹하다는 평판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에게 잔혹하면서 단호한 체사레 보르자는 이탈리아 통일을 이뤄낼 영웅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마키아벨리 눈에 체사레는 강력한 리더십과 차가운 이성을 지닌 군주의 전형이었다. 날카롭고 기민한 결단력,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잔혹한 짓도 되돌아보지 않고 실행하는 그를 보며 통일 이탈리아를 이룰 수 있는 유능한 군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는 체사레에게 실망했다. 체사레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거듭하다가 끝내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론’에서도 체사레를 거론할 때는 “교황의 아들로 태어난 운에 너무 의존했다”고 차갑게 평가했다.

 

“어떤 묘비명도 이 위대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군주론’은 1513년 초고가 완성되었다. 이후 필사본으로 회람되다가 마키아벨리가 죽고 5년이 지난 1532년 인쇄본으로 출간되었다. 그 사이 ‘전술론’(1520년)과 ‘로마사 논고’’(1531년)도 출간되었다. 1520년 피렌체 공화국의 사료편찬위원으로 임명되어 쓰기 시작한 ‘페렌체사’는 1523년 탈고해 1526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헌정했다.

‘군주론’의 당초 제목은 ‘군주정에 대하여’였으나 사후 인쇄될 때 ‘군주’로 바뀌었다. ‘군주론’은 오늘날에는 중세의 종교와 도덕으로부터 정치를 독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1559년 교황청에 의해 금서 목록으로 분류된 뒤에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올 때까지 온갖 오명을 감내해야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비록 개인적으로는 도덕에 반하는 부정·불의라 할지라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정치 우위를 주장했다. 그래서 절대 왕정시기 위정자들은 이를 군주나 정치가가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다해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정치권력을 위해서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근현대의 많은 정치인들도 자신의 행위를 마키아벨리즘에 기대어 미화했다.

그러나 ‘군주론’을 읽어보면 마키아벨리의 정치 철학을 그렇게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음을 금방 알게 된다. ‘군주론’은 모든 부도덕한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전제 군주 출현이나 군주의 권력 사유화에는 철저히 반대했다. 민주공화제는 일관되게 옹호했다. 실제로 그는 “나는 내 영혼보다 피렌체 공화국을 더 사랑했다”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은 강력한 군주제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궁극적 관심은 군주의 안녕을 넘어, 국가의 안녕이었다.

1527년 메디치 정권이 또 다시 무너지고 공화정이 재건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지난 10여 년간 메디치 정권 때 별 것 아니지만 어쨌든 정부 일을 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공직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1527년 6월 22일 숨을 거두었다. 나중에 피렌체에 세워진 그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떤 묘비명도 이 위대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구이차르디니 거리 18번지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생가. 위의 들보에는 마키아벨리의 생가에 있던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출처 조선pub)

 

■체사레 보르자, 우아한 냉혹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모델로 삼은 것은 체사레 보르자(1475~1507)다. 체사레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의 아들이다. 체사레의 보르자 가문은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해 살고 있다가 가문의 일원인 갈리스토 3세가 교황(재위 1455~1458)이 되면서 신 명문가로 부상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삼촌(갈리스토 3세)의 적극적인 후원 덕에 로마에 입성해 추기경이 되고 1492년 교황으로 즉위했다. 그는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여러 정부 사이에서 10명도 넘는 자식을 낳은 호색한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체사레 보르자다.

알토벨로 멜론(1491~1543)이 그린 체사레 보르자의 초상. 58×48㎝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15살의 아들 체사레를 추기경으로 앉히고 다른 아들과 측근은 교황청에 포진시켰다. 성직을 매매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다만 문화 예술을 진흥하는 데는 적극 지원했다. 체사레 역시 아버지를 닮아 호색한이었고 추기경에 만족하지 않았다.

교황 부자는 이탈리아 중부에 보르자 공국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키웠다. 체사레는 23세에 추기경 옷을 벗고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교황이 아들에게 내린 임무는 중부 지역에 산재한 교황령 전체를 평정하라는 거였다. 당시 교황령은 수많은 작은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교황이 임명한 군주가 다스리는 연방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관리가 느슨해지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체사레는 이 도시들을 차례차례 점령했다. 방식은 냉혹했다. 거치적거리는 대상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제거했다. 형제와 친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단기간에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한 것도 이런 잔혹함 때문이었다. 부자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그것은 스페인에서 시작한 보르자 가문이 이탈리아 전체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열병에 걸려 세상과 하직하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처지에 놓였다.

끈 떨어진 체사레를 기다린 것은 새로운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의 체포 명령이었다. 체사레는 감옥에 갇혔다가 용케 탈출했으나 32살이던 1507년 전장에서 전사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수차례 만나 그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자신보다 24살이나 적은 체사레를 신뢰했다. 영화 ‘보르히아 :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2006년)이 그 시절의 실상을 잘 알려주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가 체사레의 양면성을 추적한 명저가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다.

 

■피사 개요

피렌체를 떠난 다음 일정은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피사다. 지중해에서 멀지 않고 피렌체를 지나 내려오는 아르노 강을 끼고 있어 고대 로마 시절에는 해군기지로 활용된 곳이다. 지금은 인구 10만 명의 소도시지만 중세 시대에는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피와 더불어 이탈리아에서 번성했던 4대 해양도시 국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중세 때는 강력한 도시국가 피렌체와 경쟁하고 해상에서는 북쪽 제노바와 경쟁했다.

피사 시내. 가운데 강은 아르노강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국력이 절정에 다다랐던 12세기에는 멀리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식민지로 삼고, 아랍의 함대를 격파했으며, 한때나마 지중해 연안 무역항로를 장악했다.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서도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곳에서 태어난 유명 인물 중에는 성인 라이네리오,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 조각가 조반니 피사노, 과학자 갈릴레이 갈릴레오 등이 있다. 성 라이네리오는 방탕한 삶을 살다 회개한 후, 성수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사를 베풀어 ‘피사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성인이다. 피보나치는 아라비아 숫자를 전 세계에 알린 인물로 ‘피보나치의 수열’과 ‘황금비율’로 잘 알려져 있는 수학자이고 피사노는 이탈리아 고딕의 대표적인 조각가이다.

피사 지도

 

▲두오모 광장과 대성당

피사의 두오모(대성당)를 중심으로 조성된 광장에는 모두 6개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두오모 외에 세례당, 캄포산토(공동묘지), 종탑(피사의 사탑), 시노피에 박물관,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 등이 수백년의 세월에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들 건축물들은 피사가 가장 번성했던 11~12세기에 지어지기 시작했으나 건축 중 전쟁이 일어나면 잠시 중단했다가 평화가 찾아오면 다시 짓기를 반복해 모두 짓는데 200년가량이나 소요되었다. 특히 두오모, 종탑, 세례당, 공동묘지 등 교회 주변의 4개 명소가 있는 지역은 ‘기적의 광장’으로 불린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1863~1938)가 자신의 소설에서 ‘기적의 광장’이라고 쓴 것이 시작이다.

왼쪽부터 피사 세례당, 대성당, 종탑

 

두오모는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 건물이다. 1064년 착공해 50년 만인 1118년 헌당했다. 1063년 시칠리아 섬 팔레르모 해전에서 피사가 이슬람의 사라센 함대에 승리한 것을 기념해 지어졌다. 그래서 성당 내부에는 시칠리아 섬에서 가져온 모스크 기둥 등 관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건축가 부스케투스와 레이눌두스는 아랍 양식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우윳빛 대리석에 검은 대리석 줄무늬를 넣어 웅장하고 화려하게 성당을 지었다. 하늘에서 보면 신을 향한 믿음을 상징하는 십자가 모양이 선명히 드러나도록 건축했다. 십자가가 교차하는 중앙에는 커다란 돔을 얹었다. 청동문은 보나노 피사노가 1179~1180년 제작했지만, 1595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의 청동문은 후에 제작된 것이다.

외부 못지 않게 내부도 화려하다. 제단 위 반구형 벽면은 중세 미술의 마지막 대가인 치마부에(1240~1302)의 주도로 제작한 ‘전능하신 그리스도’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치마부에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다. 돔 천장의, 치마부에가 그린 성화 ‘복음서 기자 요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례당에서 바라다본 대성당(두오모)

 

▲세례당과 종탑

기적의 광장에서 두오모에 이어 두 번째로 짓기 시작한 것은 세례당이다. 높이는 55m, 지름은 39m로 세례당으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다. 세례 전용 공간으로 두오모와 독립적으로 지어졌는데 그만큼 교회 규모가 크고, 세례 의식이 성대했음을 말해준다.

세례당 내부

 

기본골격은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둥근 돔과 벽에 조각된 장식은 고딕양식으로 지어 조화가 절묘하다. 1153년 디오티살비의 설계로 착공되어 정국이 요동칠 때마다 짓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200여년 뒤 완공되었다. 두오모 동쪽 곁에는 원형의 대리석 종탑이 우뚝 서 있다. 피사의 사탑이다. 이 종탑 역시 일반적으로는 교회 건물의 일부로 존재하지만 피사에서는 독립된 건축물로 지어졌다.

피사의 사탑은 1173년 이탈리아 건축가 보나노 피사노의 설계로 착공했다. 그런데 3층 정도까지 올라갔을 때 남동쪽으로 조금씩 기울었다. 튼튼하지 못한 지반 위에 기초를 3m만 판 것이 원인이었다. 결국 공사는 중지되었고 이후 100여 년이 흘렀다. 제노아, 루카, 피렌체 공화국 간의 전쟁으로 종탑 건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275년, 새로운 건축가 조반니 디 시모네가 설계와 구조를 변경하고, 기울어진 상태에서 작업을 계속해 1372년 8층짜리 탑으로 완성했다. 당초 설계는 100m 이상으로 올릴 계획이었으나, 결국 58.36m에서 멈춰야 했다. 지름은 16m이다. 기울어진 채 지어져 오늘날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로 분류되고 있다.

종탑은 건립된 이후에도 매년 1㎜씩 기울어져 1990년에는 5.5도까지 기울었다. 기울어진 길이는 4.5m로 역대 최대치에 달했다. 사탑이 무너지는 것을 염려한 피사 시는 1990년부터 2001년까지 11년 동안 대규모 복원공사를 실시했다. 원래부터 모래와 흙이 많아 약했던 지반을 단단하게 다졌다. 탑이 남쪽으로 기울어진 것에 착안해 탑의 북쪽에 있는 흙과 땅을 파냈다. 탑을 남쪽으로 미는 힘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토대는 납으로, 맨 아래층은 강철 케이블로 보강해 잡아당기는 작업도 병행했다. 이런 작업 끝에 기울기가 줄어들었다.

피사의 사탑

 

기울어진 채 지어져 오늘날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로 분류돼

어느 정도 안정성이 확보되자 2001년 다시 관광객 입장을 허용했다. 그러면서도 주변의 지반을 단단하게 하는 강화 작업을 계속했다. 그 결과 2001년 4.1m 기울었던 탑이 2018년 조사에서 4㎝ 정도 바로 선 것으로 나타났다.

사탑 역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각 층에 수 십 개의 기둥이 있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탑의 상층부에 또 다른 작은 탑이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 멀리서 보면 작은 아치와 기둥들이 마치 레이스 장식처럼 꾸며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피사의 사탑은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탑 꼭대기에서 질량이 다른 두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려 낙하속도를 쟀다는 일화로 많이 알려졌으나 이 일화는 갈릴레오의 전기를 쓴 그의 제자 비비아니가 스승을 미화해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사탑에 오르려면 294개의 나선형 계단을 걸어서 올라야 한다. 사탑 꼭대기에 오르면 거대한 종, 시내 풍경, 기적의 광장, 세례당과 두오모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맨 꼭대기 종루에는 각기 다른 음계를 가진 7개의 종이 있다. 사탑의 안전을 고려해서 입장시간과 인원은 철저하게 관리한다. 한 번에 20명 정도만 입장시킨다.

납골당(캄포산토)

 

두오모 북쪽에는 회랑형 건물인 캄포산토가 있고 그 안에는 잔디 정원이 있다. 캄포산토는 죽은 자들이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청하며 만든 사각 형태의 무덤 건물이다. 회랑의 통로에는 석관과 묘지 조각품이 전시되어 죽은 자들과 유가족들을 위로한다. 벽에는 생명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여러 프레스코가 걸려 있다. 캄포산토는 12세기에 피사의 대주교가 십자군 원정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골고다 언덕에서 배 5척 분량의 흙을 가져온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고 한다.

피사의 사탑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다양한 포즈로 인증샷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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