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로마 교황, 영국 왕 헨리 8세 파문했으나 효과 없어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는 한 역사가의 말마따나 멋지고 당당했으나 호색한이었고 다혈질이었다. 대포·신학·여성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해군부를 창설, 영국을 해양대국으로 발전시켰고,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소유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신학에도 해박했으며, 지칠줄 모르는 욕정으로 왕비도 6명이나 갈아치웠다. 형이 죽어 형수 캐서린과 결혼한 헨리 8세의 첫 결혼생활은 그런대로 순탄했다. 그러나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좀처럼 태어나지 않자 헨리 8세는 이혼을 결심하고 명분을 찾는다. 다행히 형제 아내와의 결혼을 금한 성경구절 레위기 20장21절이 눈에 들어왔다.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이혼을 요청했지만 교황은 허락할 수 없었다. 당시 교황은 유럽 대륙의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사실상의 포로나 다름없었는데 문제는 카를로스 1세가 캐서린의 조카라는데 있었다.

헨리 8세는 그가 장악하고 있는 의회를 통해 해법을 찾았다. 1532년 의회는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잉글랜드 국교를 설립하고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종교개혁의 여파가 잉글랜드까지 미친 결과였겠지만 어쨌든 ‘성공회’는 첫 발을 이렇게 내디뎠다. 결국 그가 임명한 성공회 대주교가 그의 결혼을 무효화시켜주고, 이를 근거로 다른 여자와도 결혼함으로써 헨리 8세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1533년 7월 11일, 교황이 파문으로 보복했지만 약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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