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유럽 연합군 간의 워털루 전투 개전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유럽 연합군에 패해 엘바섬으로 유배됐던 나폴레옹이 1년만인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고 황제에 즉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연합군이 다시 힘을 결집했다. 연합군과 나폴레옹 간의 결전 장소는 벨기에 브뤼셀 남쪽 워털루였다. 영국을 주축으로 한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 9만 5000여 명의 연합군은 영국의 웰링턴이 이끌었고 12만 명의 프로이센군은 블뤄허가 지휘했다.

이에 맞선 나폴레옹군도 12만 5000명에 달했다. 워털루에 집결하기 전 웰링턴은 북쪽에서 진군해 왔고, 블뤄허는 측면을 보조하며 웰링턴과 합세를 시도했다.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도 독일 영토를 가로질러 프랑스로 진군했다. 이들의 합류를 막기위해 서둘러 벨기에 국경을 넘은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6일 프로이센 군대를 격퇴시키고는 곧바로 워털루로 진군했다. 기동력을 앞세운 속전속결이 그의 주특기였음에도 나폴레옹은 이틀이 지나서야 휘하 장군에게 프로이센 군대를 쫓으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워털루에서 웰링턴과 대치했다. 나폴레옹은 전투를 자신했고 웰링턴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6월 18일 전투가 시작되기 전 나폴레옹군에는 몇 가지 악재가 겹쳐 있었다. 나폴레옹 자신이 치질과 방광염을 앓아 전쟁에 집중할 수 없었던 데다 전날 내린 폭우로 그가 자랑하는 천하무적의 포병은 무력하기만 했다. 이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1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네 번이나 공격했으나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했다. 더구나 쫓기던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군을 따돌리고 워털루로 집결해 웰링턴과 합류한 것도 나폴레옹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 모든 것들은 나폴레옹의 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이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항복해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됐고 6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나폴레옹의 패배로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완고한 복고 체제가 다시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점에서 워털루 전투는 유럽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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