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제1회 세계여성대회 멕시코에서 개막

20세기는 여성해방운동의 세기였다. 여성참정권은 1920~1930년대를 거쳐 착실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남성들과의 차별은 속도가 더디긴 했으나 차츰 좁혀들었다. 1960년대~197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여성해방의 물결이 뜨겁게 달구어졌고 이를 계기로 각국의 여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장(場)은 유엔이 1975년을 ‘세계여성의 해’로 지정하고, 1976년부터 1985년까지를 ‘여성을 위한 10년’으로 설정함으로써 마련해주었다.

‘평등․발전․평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제1회 세계여성대회가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것은 1975년 6월 19일부터 2주 동안이었다. 대회는 반다라나이케 스리랑카 총리,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 테레슈코바, 이멜다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부인, 지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부인 등 세계 138개 국에서 2000여 명의 여성들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한국에서도 이효재 당시 이화여대 교수 등이 참석해 한국 여성들이 처하고 있는 현실을 세계에 알렸다. ‘국제여성의 해 트리뷴’이라 불린 비공식 행사도 낙태반대론자부터 전투적인 여성해방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제기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향상이라는 공통의 목표로 모인 자리였지만 국가마다 여성이 처한 상황이 달라 관심분야에 큰 편차를 보였다. 각국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정치선전장으로 변하기도 해 레아 라빈 이스라엘 총리의 부인이 연설할 때는 친아랍공화국의 대표 100여 명이 퇴장하기도 했다. 여성대회였는데도 불구하고 35명의 대회 최고위직 중 여성은 사무총장이 유일할 정도로 주요직을 남성들이 차지한 것도 문제가 됐다. 특히 멕시코는 자국의 대표를 남성으로 하고 그를 대회 의장으로 선출해 빈축을 샀다. 첫 대회인 탓에 눈에 띠는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세계 여성이 처음 한 자리에 모이고 미스․미세스로 불리던 여성을 ‘미즈’로 통일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대회였다.

마지막날, 참석자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해야 할 행동계획들을 정하고 7월 2일 대회를 마쳤다. 이후 5년마다 대륙을 달리해 덴마크의 코펜하겐(1980년), 케냐의 나이로비(1985년), 중국의 북경(1995년) 에서 대회가 열려 여성의 결속을 다지고 여성이 처한 제반 문제를 논의했으나 2000년 이후에는 대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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