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제주도 3분의 1 크기에 불과한 대마도는 본시 경상도 계림에 속해 있는 땅이었다. “내왕이 불편해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게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대마도는 원래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쓰여있을 만큼 대마도는 우리 영토로 당연시여겼다. 대동여지도는 물론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 대부분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포함시키고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까지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그만큼 대마도는 정서적으로 한국에 가까웠다. 대마도로부터 일본 규슈까지가 147㎞인데 비해 부산까지는 49.5㎞ 밖에 안되어 거리도 한국 쪽이 훨씬 가까웠다.

이처럼 우리의 속주(屬州)로 여겨온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돼 우리 연안을 본격적으로 유린한 것은 고려 말~조선 초 때의 격변기였다. 두 번이나 대대적으로 대마도를 정벌하고 유화책을 써 봤지만 약탈 행위가 근절되지 않자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이 1419년(세종1년)에 이종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한 대마도 정벌군을 편성했다. 왜구들이 명나라 연안을 약탈하러 가던 중 충청도 비인현과 황해도 해주 연평곶 등에 침몰, 이 지역을 쑥밭으로 만든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 됐다.

1419년 6월, 충청 전라 경상 3도 수군이 거제도 견내량에 집결했다. 병선 227척에 병력이 1만 7300명이나 된 우리 역사상 보기드문 대규모 해외원정군이었다. 6월 20일 정벌군이 대마도 아소만에 상륙해 대마도주의 항복을 권했으나 반응이 없자 본격적으로 토벌에 나섰다. 129척의 선박을 소각·포획하고 가옥도 1940여 채나 불태웠다. 왜구도 104명을 죽이고 21명을 포로로 삼았다. 한 번의 정벌로 왜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수 십년간 지속돼온 국가의 근심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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