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중국 의화단 사건 발발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퉈 중국을 향해 탐욕의 발톱을 곧추 세우던 시기, 중국에서도 ‘의화단(義和團)’이라는 비밀결사 농민집단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부패한 청조, 열강의 침략, 청일전쟁 배상금 등이 불러온 민중의 고통은 의화단의 세력확대를 도와준 자양분이었고, “권법과 봉술을 익혀 주문 만 외우면 총탄도 피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문은 이들을 지탱해 준 힘이 됐다.

산둥성에서 처음 일어날 때 만해도 미미했던 세력이 1900년 5월 ‘부청멸양’(扶淸滅洋·청을 돕고 서양을 멸한다)을 기치로 베이징에 입성할 때는 어느덧 20만의 세력으로 커져 있었다. 서양 선교사와 독일의 남작이 피살되고 외국공관이 포위되는 등 북경 거리는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됐다. 철도·전선 등 서양과 관계된 시설이라면 닥치는대로 파괴됐다.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독일·오스트리아 등 8개국이 5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이미 천진이 점령되고 북경~천진 간 통신선 마저 파괴되어 오히려 고립되는 결과만 낳았다.

처음에는 의화단을 탄압했던 청조도 이들의 힘을 빌려 6월 21일, 열강들에게 선전포고를 했지만 결과적으로 군사개입만 자초했다. 2만 명의 연합군이 천진을 공략한 데 이어 8월 14일 북경까지 점령함으로써 이미 실권자 서태후가 빠져나가 주인없는 도시가 된 북경은 연합군의 약탈장으로 변했다.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일어난 반제(反帝)운동이었지만 그 실패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청조의 숨통을 빨리 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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