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김형욱 美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 대통령 맹공

 

4년 전 소리소문없이 서울을 빠져나가 미국에 숨어살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은 1977년 6월 22일이었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당시 한미관계는 박동선 사건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벼랑으로 내몰릴 때였다. 미 언론들은 “한국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1970년대에만 20명 이상의 미 의원들에게 50만~100만달러의 뇌물을 썼다”며 한국 정부를 ‘공작 덩어리’ ‘악의 소굴’로 매도하고 있었다. 1977년 1월 인권과 도덕을 내건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고 2월 프레이저 소위가 한미관계 전반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되면서 미국은 한국정부의 뒤를 캐는데 혈안이었다. 그때 김형욱이 반(反) 박정희 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미 언론이 연일 한국 정부를 동네북처럼 두들기는 상황에서, 박 정권의 내밀한 내용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김형욱이 프레이저 소위의 증인으로 출석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박 정권에 비상이 걸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편지를 쓰고 정일권 국회의장을 비롯 김종필, 한병기 당시 주유엔 대사 등이 미국에서 김형욱을 만나 귀국을 간곡히 권유했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김형욱은 청문회가 있기 전인 1977년 6월 5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의 침묵을 깼다. “박동선은 내가 정보부장 때 부린 사람”이라며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김형욱은 1961년 5·16 쿠데타에 가담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7월부터 6년 3개월 동안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실세 중의 실세였다. 3선 개헌을 주도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했으나 3선 개헌 후인 1969년 10월 중앙정보부장에서 전격 해임되면서 박 대통령과 멀어졌다. 이후 국회의원을 1년 남짓 했을 뿐 유신 정권에서 완전히 소외되자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숨어 지내다 미 하원 ‘프레이저 소위’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김형욱은 청문회에서 박 정권을 향해 거침없이 포격을 가했다. 6시간 20분간에 걸친 청문회를 통해 박동선과 통일교, 김대중 납치사건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부의 약점을 헤집으며 박정희 가슴에 통한의 못질을 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박 대통령이 오직 김형욱만을 겨냥한 위헌적인 ‘반국가행위자 재산 몰수에 관한 특별조치법’(1977년)까지 만들었지만 효력은 없었다.

박 정권은 이미 엎질러진 청문회보다 원고가 완성된 것으로 확인된 김형욱의 회고록 발간을 중단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977년 가을, 미국으로 달려간 중앙정보부 간부가 집요하게 회고록 중단을 요구하자 김형욱은 수십 만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회고록 원본을 중정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김형욱이 최후의 무기로 남겨둔 사본이 문제였다. 김형욱은 사본을 자신이 책임지고 없애기로 중앙정보부와 약속했으나 이미 사본의 사본이 돌아다니면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79년 4월 회고록의 요약본이 일본에서 출판되면서 박 대통령과는 사실상 화해가 불가능해졌다. 결말은 김형욱의 파리 실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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