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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천년 고도’ 교토(京都)에서 확인한 400여년 전 순교의 깊은 상처

↑ 교토 가모가와(鴨川) 부근 도로변에 있는 ‘겐나(元和) 크리스천 순교의 지(地)’ 석비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일본에서 크리스천의 순교지라고 하면 대부분 규슈의 나가사키로 알고 있다. 하지만, 천년 고도(古都) 교토도 순교에 대한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나는 교토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던 가모가와(鴨川)로 가기 위해서 택시를 탔다. 400년 전 역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가모가와 고조가와라(5条河原)로 갑시다.”

택시 운전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나의 요구대로 차를 몰았다.

“혹시, 특별한 목적이 있으신가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400여 년 전 처형장의 흔적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는 계속 의구심을 표출하면서 “제가 운전을 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습니다만, 처형장을 찾는 분은 손님이 처음이십니다. 실례지만 어디에서 오셨나요?”하고 물었다.

내가 피식 웃으면서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자,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인이 무엇 때문에 일본인들도 모르는 처형장을 찾으시려고 합니까?”

“그저 궁금해서요.”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골목길을 돌고 돌아 가모가와에 다다랐다.

 

55명 순교자, 장작더미 위에서 십자가에 묶여 하늘나라로 떠나

강물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바람도 시원했다. 도로변에 작은 석비가 하나 있어서 들여다봤다.

‘겐나(元和) 크리스천 순교의 지(地)’

겐나(元和, 1615~1624년)는 일본의 연호이다. 에도 막부에 의해 당시 크리스천들이 철저히 탄압당했던 시절이다. 1619년 이 자리에서 55명이 순교를 당했다. 남자가 26명, 여자가 26명으로 15살 이하 어린이도 11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장작더미 위에서 27개의 십자가에 겹겹이 묶여 하늘나라로 갔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모두가 가슴 찢어지는 슬픈 사연이지만 특히 하시모토 테클라는 여성의 순교가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3세, 8세, 11세의 어린아이와 같은 십자가에 묶여 불타 죽었다. 천국에서의 재회를 맹세하며 아이들을 격려하면서 “예수, 마리아”를 외치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팔에 안긴 아이들을 놓지 않았다.>

이 내용은 당시 교토에서 살던 영국 상인 리처드 콕스가 쓴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토(京都)의 대순교’(나카야마 마사미·中山正実 作). 하시모토 테클라가 3명의 아이들과 함께 불에 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십자가에 묶여 순교하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에칭화

 

나는 또 다른 흔적들을 찾기 위해서 강둑을 걸었다. 풀잎 사이에 작은 시비 하나가 숨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의 꽃을 보면서/ 서성대다보면/ 가모강변에 다다르네./(강에는) 물새가 춤을 추도다.”

무라카미 시즈요(村上靜代)의 노래가 새겨진 비(碑)였다.

‘떨어진 꽃잎들은 저 강물을 따라 흘러갔으리…’

무라카미 시즈요의 노래가 새겨진 비(碑)

 

고니시 유키나가, 머리에 성상을 세 번 대고 난 뒤 참수돼

순교의 개념과는 다르지만 419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실이 또 있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동군의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체포된 것은 5일 후인 9월 21일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는 이미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1600년 10월 1일. 눈에 핏발이 선 이에야스(家康)가 고니시(小西)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할복하라! 장군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을 거룩하게 보여라!”

“싫소. 나의 목을 치시오. 기리스탄(크리스천)인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가 없소이다.”

“저런, 저런, 저자의 목을 쳐라.”

규슈 우도 성터에 있는 고니시(小西)의 동상

 

절박한 순간에 정토종 승려가 고니시의 머리 위에 경문을 갖다 대려고하자,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크리스천에게 불경을 읊다니… 불경 따위는 필요 없다.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를 불러 달라.”

“안 된다. 사제를 불러오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서로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다. 다시 고니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포르투갈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Margarita de Austria-Estiria)에게서 선물 받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성상(聖像)을 주시오.”

마지못해 도쿠가와는 고니시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줬다. 고니시는 자신의 머리에 성상을 세

번 대고 난 뒤에 참수됐다. 할복 자결을 거부하고 효수당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지막 명을 내렸다.

“고니시의 목을 산조 오하시(三條大橋, 현 교토 시의 동서 통로인 다리)에 걸어라.”

로구조가와라(현 5条河原)는 예로부터 권력자에 반항한 정치인·종교인들이 처형당했던 곳이다.

다리 위에서 강을 내려다 봤다. 강물은 옛 상처를 기억조차 못하는 듯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강물 따라 유영하는 물새들을 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고니시가 처형당한 강변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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